우리는 미래를 위해 얼만큼의 현재를 희생할 것인가/해도 되는가/해도 좋은가
학교 다닐 적 현대소설론 수업에 제출했던 과제,
스타트업씬을 다룬 '센터'라는 단편소설에 대한 독후감을 공유합니다.
내보이기 부끄러운 글이지만,
스타트업씬에 계신 분들이라면 인상깊다고 느끼실 단편 소설을 추천하는 마음으로 공유해봅니다.
제가 소설을 읽고 느낀 핵심 감상은 아티클 제목과 같습니다.
이 시대의 자본주의를 고발하는, 창작 소설란에 제출된 르포
- 장강명 작가의 ‘센터’를 읽고 (‘릿터’ 47호)
「센터」는 ‘맞춤형 밀키트 배달’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의 초기에 합류하여 어느정도 사업 규모가 커지기까지 일했던 주인공이 이 당시의 경험을 서술한 익명 커뮤니티 게시글의 형태를 취한다. 게시글에는 주인공이 목격한 스타트업 성장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인간 군상, 반목하게 되는 과정, 겪게 되는 여러 갈등과 딜레마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이를테면 사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밀키트를 포장하는 물류 센터를 먼 지방에 새로 짓게 되는데,
1) 지금껏 사업 확장에 일조한 것이 없잖은 여사님들의 임금을 올려줄 것인가 (대체 가능한 인력인데 불필요
한 고정비 부담 증가하는 선택)
2) 말 것인가 (근무지가 본래보다 멀어짐에 따라 여사님들은 더 이상 함께 일할 수 없어지고, 지금껏 함께 일궜던 좋은 기업 문화를 포기하는 선택)
과 같은 식의 딜레마이다. 작품 내용상으론 회사가 결국 기존 여사님들과 계속하기를 포기하고 도급 업체와 새로 계약을 맺는데,
1) 도급 업체 인력들이 자기네들이 고용한 새로운 여사님들을 착취하면서 지금까지 일궈왔던 기업 문화를 해치는 문제가 발생한다.
-> 2) 그래서 도급 업체와 계약을 끊고 직고용 체계로 바꾸지만 업무 생산성은 증진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고,
-> 3) 대기업 유통업체에서 부장까지 맡았던 디렉터가 시스템을 운영할 줄만 알았지 시스템을 세팅해본 경험은 없어서 회사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문제가 연이어 발생하는 등.
계속해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에 대해 회사는 이해 관계자들간의 치열한 논쟁들을 거치며 선택들을
해나간다.
이 소설의 결말은
1) 사람에게 쉽사리 곁을 내주진 않고 정이 없어 보이지만 - 은근히 단순 인력들의 처우 개선이나 고용 안정성 관련한 사안에 강하게 목소리를 내며 본부와 마찰을 일으키던 팀장이 결국 잘리고,
2) 주인공도 이 회사에서 2년 정도 더 일하다 나오는데,
결국 꽤 규모있는 유통기업 물류센터에서 사람들의 목표 실적을 조정하는 중간 관리자로 일하고 있음을 밝히며 게시글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센터」는 계급 문학과 대별되는, 리얼리즘 소설의 계보를 잇는다.
현대 소설사를 살피자면, 일제강점, 6.25 전쟁, 군부독재 등으로 이어져오는 공통 현실 위에 리얼리즘 소설이 융성할 수 있었다. 정보 통신의 기술의 발달 및 민주화에 따라 다양성이 증대되고 단일한 공통 현실의 존재감이 약해짐에 따라, 한 국가에서 같이 살아가는 공동체가 마주하고 있는 단일한 공통 현실을 고발하는 리얼리즘 소설보다는 여성, 성소수자 등의 국가보다 작은 개념으로 분화된 공동체의 현실들을 고발하는 리얼리즘 소설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고 현재를 진단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이 우리 공동체가 마주한 공통 현실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공통 현실의 존재감이 약해졌다고 느껴질 때가 공통 현실에 이미 젖어들어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위험을 의심해보아야할 때이다. 이제껏 고발되어온 공통 현실은 다수의 대중들이 문제적으로 인식하기보단, 자연스럽다고 수용하고 있는 ‘시대적 패러다임’의 형태였기 때문이다. 「센터」는 ‘자본주의’, 그 중에서도 현 시점 ‘스케일업 환상’에 빠진 ‘자본주의’를 고발한다. ‘스타트업’이라는 제재 자체가 지엽적인 것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본 소설은 스타트업의 ‘스케일 업’(“스타트업은 흑자를 내는 게 목표가 아니야. 성장을 하는 게 목표야.”)개념에서 볼 수 있듯이, 미래와 성장을 위해 현재의 희생을 감수하는 행위가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스타트업 현장을 조명함으로써 리얼리즘 소설로서 시대적 사명을 성실히 수행한다.
본 작품을 그간의 계급 문학 작품의 일종으로 파악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작가는 소설 속 본부 측 인물, 즉 사용자가 악마화되는 것을 경계한다. 이는 지속되는 적자에 눈 중풍에 걸려 한쪽 눈이 흐릿해진 대표와 과로가 쌓인 상태에서 야근하다가 실족하여 다리가 부러진 대표 남편의 모습을 조명하는 것 등에서 확인된다. 사용자 입장을 대변하는 본부 측과 비교적 노동자 입장에 가까운 팀장 측간에 발생하는 수 차례의 대립은 어느 한 쪽에 의해 일방적으로 해소되는 양상을 띠기보다는 나름의 민주적 회의와 최소한의 합의를 거쳐 해소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착취’ 문제보다는 ‘자본주의’가 불러일으키는 ‘성장’이라는 환상에 대해 조명하는 것에 가깝다.
자본주의에 대한 해결점을 제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소설 속 팀장의 말처럼, 정확한 ‘문제 정의’가 문제 해결의 시작점인 것은 분명하다. 소설은 문제를 문제적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데에 탁월하다. 거시적인 시대의 문제를 마주한 한 명의 개인이 겪는 복잡한 내면 감정을 전달하고 이에 대한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때문에 리얼리즘 소설은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포착해내는 것에 감동이 있다. 스타트업에서의 경험을 살려 유통기업 물류센터로 이직한 주인공은 결말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긴 자동화센터라서 일하는 도급업체 사람들 다 갈려나감. 실적 못 채우면 쉬는 시간 그런
거 없어. 실적 채우고 쉬는 시간 넉넉하면? 그러면 얼마 뒤에 목표가 더 높아짐 ㅋㅋㅋ 그
목표 조정을 내가 하고 있다 ㅆㅂ... 사람 사는 게 뭔지...”
우리는 미래를 위해 얼만큼의 현재를 희생할 것인가. 이 질문을 사용자 입장에서 조금 더 구체화해볼 수 있다. 미래의 사람들을 위해 현재의 사람들을 얼마나 희생시킬 것인가. 이미 거듭 반복되어온 질문일까. 노동자들은 주로 현재의 편을 들지만, 사용자는 주로 미래의 편을 든다. 주인공은 노동자편과 사용자편 그 어디쯤에서 방황한다. 이 시대의 자본주의는 이러한 방황들을 방치하며, 제 크기를 불려간다. 스케일-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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