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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ho Park
Jinho Park ·

삶의 해상도

  1. 예전에 파리에 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혼자 하는 여행은 익숙치 않아 시티 투어를 신청했는데 코스가 알찼습니다. 중간에는 오르세 미술관에서 자유롭게 관람하는 시간도 주어졌는데요, 소장하는 작품이 다양했지만 제 시선을 사로잡은 건 모네나 에드가 드가 같은 인상주의 작품들이었습니다. 인상주의의 본고장에서 작품을 즐길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며 한동안 서성거렸던 게 기억 납니다.
  2. 저는 '줌인 & 줌아웃'이라는 관람법을 좋아했습니다. 최대한 작품에 가깝게 서서 작품의 아주 작은 한 지점만 뚫어지게 봤다가 천천히 작품 전체를 보는 방법입니다. 실제로 있는 방법은 아닐 겁니다. 제가 붙인 이름이거든요.
  3. 작품을 줌인해서 보면 몇 개의 붓질과 물감의 질감, 색깔 몇 개만 보입니다. 아주 단편적이고 직접적인 데이터들이죠. 그러다가 천천히 작품 전체로 시야를 확장하면 어딘가 탁 트이는 느낌이 옵니다.
  4. 몇 번의 붓질이 파도가 되어 철썩일 때, 검은색으로 이뤄지지 않은 검은색이 우울한 표정의 그늘로 변할 때, 줌아웃하는 경험은 화가가 그 작품을 그리던 순간을 함께 경험하는 듯했습니다. 줌인한 상태에서는 알기 어려웠던 붓질의 의미를 줌아웃하며 작품 전체에서 맥락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5. 수년이 지난 그 경험을 이제 와 떠올리는 건 앎을 대하는 게 미술 작품을 줌인, 줌아웃하며 보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어디에 어떻게 쓰일지 모르는 작은 지식이나 경험이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절묘한 위치에 그은 한 번의 붓질이 될 수도 있고요, 여러 색이 모여 깊이 있는 색으로 변모하는 것처럼 그렇게 쓰일 줄 몰랐던 정보가 다른 정보들과 결합해 소중한 지혜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6. 일상속에서 마주하는 지식과 정보들은 종종 별 가치가 없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줌을 놓고 미래에서 보면 인생의 방향을 바꿀 지혜의 한 조각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7. 운은 기회와 준비가 교차하는 순간에 온다고 합니다. 기회를 맞이할 준비라는 건 어떤 앎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 안에 여러 번의 붓질을 더하다보면 더 또렷하고 선명한 그림 한 편을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요.
  8. 지금, 저는 어느 때보다 성장과 자기 계발에 목이 마른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수학이 내 인생에 어떤 쓸모가 있느냐고 짜증 내던 어릴 때처럼) 여전히 때때로 이건 내 분야가 아니라느니 그래도 왠지 듣고 싶지 않다느니 하면서 지식을 팽개친 때도 있었습니다.
  9. 하지만 이제는 어디에 맞춰 들어갈 지식일지, 당장은 몰라도 머릿속 한 편에 그려두는 자세를 가져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나씩 더하다 보면 여러 붓질이 모여 한 폭의 그림이 되듯 제 안에서 선명한 작품 하나를 마주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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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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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한
박종한

이전 글에서 글을 쓰는 걸 업으로 삼으셨다는 이야기를 본 것 같은데, 과연 그렇네요! 정말 글 잘 쓰시네요 ㅎㅎ 저도 그런 느낌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한 부분만 보였던 걸 전체를 다 볼 수 있게 되었다던가 하는 순간에 느끼게 되는 느낌을요.

Jinho Park
Jinho Park

감사합니다! 사실 올릴까 말까 고민 많이 했는데 올리길 잘했네요. 하나씩 쌓는다는 생각으로 조금씩이라도 올리고 있습니다. 인식이 확장되는 순간이 뭔가를 깨닫는 순간인 것 같아요. 종한님 글 읽으면서도 그런 '내가 봤던 게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