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삶의 해상도
- 예전에 파리에 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혼자 하는 여행은 익숙치 않아 시티 투어를 신청했는데 코스가 알찼습니다. 중간에는 오르세 미술관에서 자유롭게 관람하는 시간도 주어졌는데요, 소장하는 작품이 다양했지만 제 시선을 사로잡은 건 모네나 에드가 드가 같은 인상주의 작품들이었습니다. 인상주의의 본고장에서 작품을 즐길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며 한동안 서성거렸던 게 기억 납니다.
- 저는 '줌인 & 줌아웃'이라는 관람법을 좋아했습니다. 최대한 작품에 가깝게 서서 작품의 아주 작은 한 지점만 뚫어지게 봤다가 천천히 작품 전체를 보는 방법입니다. 실제로 있는 방법은 아닐 겁니다. 제가 붙인 이름이거든요.
- 작품을 줌인해서 보면 몇 개의 붓질과 물감의 질감, 색깔 몇 개만 보입니다. 아주 단편적이고 직접적인 데이터들이죠. 그러다가 천천히 작품 전체로 시야를 확장하면 어딘가 탁 트이는 느낌이 옵니다.
- 몇 번의 붓질이 파도가 되어 철썩일 때, 검은색으로 이뤄지지 않은 검은색이 우울한 표정의 그늘로 변할 때, 줌아웃하는 경험은 화가가 그 작품을 그리던 순간을 함께 경험하는 듯했습니다. 줌인한 상태에서는 알기 어려웠던 붓질의 의미를 줌아웃하며 작품 전체에서 맥락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수년이 지난 그 경험을 이제 와 떠올리는 건 앎을 대하는 게 미술 작품을 줌인, 줌아웃하며 보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어디에 어떻게 쓰일지 모르는 작은 지식이나 경험이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절묘한 위치에 그은 한 번의 붓질이 될 수도 있고요, 여러 색이 모여 깊이 있는 색으로 변모하는 것처럼 그렇게 쓰일 줄 몰랐던 정보가 다른 정보들과 결합해 소중한 지혜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 일상속에서 마주하는 지식과 정보들은 종종 별 가치가 없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줌을 놓고 미래에서 보면 인생의 방향을 바꿀 지혜의 한 조각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 운은 기회와 준비가 교차하는 순간에 온다고 합니다. 기회를 맞이할 준비라는 건 어떤 앎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 안에 여러 번의 붓질을 더하다보면 더 또렷하고 선명한 그림 한 편을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요.
- 지금, 저는 어느 때보다 성장과 자기 계발에 목이 마른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수학이 내 인생에 어떤 쓸모가 있느냐고 짜증 내던 어릴 때처럼) 여전히 때때로 이건 내 분야가 아니라느니 그래도 왠지 듣고 싶지 않다느니 하면서 지식을 팽개친 때도 있었습니다.
- 하지만 이제는 어디에 맞춰 들어갈 지식일지, 당장은 몰라도 머릿속 한 편에 그려두는 자세를 가져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나씩 더하다 보면 여러 붓질이 모여 한 폭의 그림이 되듯 제 안에서 선명한 작품 하나를 마주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죠.
4
댓글
로그인 후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이전 글에서 글을 쓰는 걸 업으로 삼으셨다는 이야기를 본 것 같은데, 과연 그렇네요! 정말 글 잘 쓰시네요 ㅎㅎ 저도 그런 느낌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한 부분만 보였던 걸 전체를 다 볼 수 있게 되었다던가 하는 순간에 느끼게 되는 느낌을요.
감사합니다! 사실 올릴까 말까 고민 많이 했는데 올리길 잘했네요. 하나씩 쌓는다는 생각으로 조금씩이라도 올리고 있습니다. 인식이 확장되는 순간이 뭔가를 깨닫는 순간인 것 같아요. 종한님 글 읽으면서도 그런 '내가 봤던 게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