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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
김태완 ·

저는 요새 회고를 해요.


디스콰이엇에서 원래 인사이트도 글도 자주 나눴었는데, 요새 통 바빠서 제대로 들어오지 못한 점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방문하지 못하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궁금하시면 커피챗을 해보시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언제나 환영해여)


연말이기도 하고, 20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보니 요새는 계속 저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데요. 영준님께서 운영하시는 계란 한 판 에세이에서 글을 씁니다. 12월 1일부터 쭉쭉 쓰고 있는데, 어느새 누적된 글이 13개에, 누적된 글자수만 12,187자가 넘어가네요. 자기소개서를 열심히 쓸 때도 이렇게 많이 쓴 적이 없었는데 말이죠.


나를 향한 글들은 내가 살아온 기적의 자취였고, 앞으로 내가 살아갈 기적을 만드는 일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일단)적자 생존'은 스타트업에게도 개인에게도 필요한 행위같아요. 쓰는 것이 남는 장사입니다.


여태 회고로 썼던 글 중에서 가장 길게 쓴 글이 있어서 하나 공유드립니다. 너무 길어서 위에만 읽어도 괜찮아요!


<20대 회고 - 내 20대의 구간을 나눈다면>


최근의 기억보다 과거의 기억을 더 자세히 써보려 한다.


[20살 21살] - 방황기

20살 때 호기롭게 들어온 국문과의 나날. 국문 학도의 꿈을 가득 품고 들어왔던 20살의 나는, 이상한 낭만이 있었다. 본디 국문과라면 토트백 안에 전공 서적을 담고, 한 손에는 시집 또는 소설집을 들고 다니는 줄만 알았다. 문학을 향유하기 위해 낭만이라는 이름을 거창하게 붙이며 결석을 당연시하는 줄만 알았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먹고 살길을 위해 공무원을 택하는 이들이 많았고, 결석은 그저 결석이며 놀기 위해서였다. 현실로 돌아온 나는 상황을 빠르게 이해하며 낭만은 저 뒤쪽으로 내팽개쳤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크게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학과를 싫어한 건 아니었다. 수업은 재밌었지만 단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게 문제였다. 공부는 따로 하지 않고 하나는 열심히 했었는데 그건 바로 교내 신문 기자 생활이었다. 고등학교 때 교내 신문 만드는 데 일조했던 경험과 좋아하던 선배의 조언 덕분에 들어갔던 교내 신문사는 악명이 높았다.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말이 많았고, 이 신문사 생활 자체가 빡세기 때문에 다른 활동은 전혀 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근데 즐거울 것 같다,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커졌다.


우여곡절 끝에 신문기자가 될 수 있었고, 2주에 한 번씩 내는 신문에 기사를 싣기 위해서 밤낮으로 고생했다. 격주로 내는 신문도 이렇게 할 게 많은데, 일간지는 대체 어떻게 내는 걸까 싶었다. 취재하는 일도 재밌었고, 기사를 쓰는 일도 좋았기에 기자를 할까? 생각도 했었지만 14년도에 세월호 침몰 사고가 나고,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과 접하는 기사들을 보며 이 생각을 말끔하게 접었다. 내가 쓰는 기사에 대한 책임감을 온전히 질 수 있는가? 나는 저널리즘에 따라서 기사를 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졌을 때 자신이 없었다. 업이 지닌 소명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


2학기가 될 무렵에는 잘 다니던 신문기자마저 관두고, 우울증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왔다. 아예 학교를 나가지 않았으며, 하루에 18시간은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시험도 보지 않아 남들은 한 번 맞기도 힘들다는 쌍권총을 두 번이나 맞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어영부영 군대에 간다는 핑계로 본가로 돌아왔다.


[21살부터 23살] - 도전기

당시에는 군대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됐다. 입영 날짜를 받기 위해서는 ‘당첨’이 되길 바라야 했는데, 어떻게든 빨리 들어가서 제대하고 싶어 야전공병도 지원하고 동반 입대도 지원했는데 모든 게 떨어졌다. 하염없이 떨어지기만 하는 상황에서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삼성SDS 협력업체에 조공으로 일하게 되었다. 순혈 문과인데다가 공구를 만져볼 일이 전혀 없었으니 이때 처음으로 공구를 만져보고 써봤다. 좋은 형님들을 만날 수 있어 일을 배우는 법이나 형님들을 대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6개월 남짓을 조공으로 일하며 좋은 경험을 했다.


21살 7월에 나는 진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해군에 가게 되었다. 당시에는 교차지원이라는 게 있었는데 이게, 육군 - 해병대를 제외하고는 육군-공군, 육군-해군식으로 동시에 지원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이런 기능도 있구나 하고 구경하고 닫았었는데 나도 모르게 공군-해군으로 지원이 되었고 해군 1차 합격 소식을 전달받게 되었다. 당시 조공으로 출근하고 문자를 받았을 때 문자가 잘못 온 줄 알았다. 당시에는 어떻게든 군대에 가기만 하면 되었기에, 상관없었다.


​해군에서는 조공 생활이 도움이 많이 되었다. 공구를 쓸 일이 많았는데, 이미 써본 공구가 많아서 이름을 따로 외우지 않아도 되었고 좀 더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남들은 군대 가서 일 잘하면 개고생이라고 했지만 나는 인정받고 싶었다. 일 못 한다고 낙인찍혀서 군 생활의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변하는 것보다는 전자가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저것 경험해 보는 게 더 도움이 된다는 걸 6개월간의 조공 생활할 때 느꼈다. 우연히 갔던 해군이었지만 운이 좋게도 국제 관함식을 참가하는 군함에 승선하는 덕분에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외를 가볼 수 있었다.


당시 내가 타던 군함은 파병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병장들에게 파병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갈 수 있으면 꼭 가보라는 말이 너무나 가슴을 울리게 했다. 훈련소 때도 가고 싶었지만, 가본 사람들이 말하는 경험담은 더더욱 불씨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꼭 파병을 가겠다’라고 적었던 선언문은 실제로 이뤄졌다. 어찌 보면 선언했기 때문에 내가 갈 방법을 모색했고 그 기회가 왔을 때 잡은 거로 생각한다. 나는 23개월의 일반적인 군 생활로 마무리하지 않고 전문하사를 지원해 2017년 5월 2일 청해 부대 24진으로 파병을 떠났다. 이미 병장이라는 계급장을 달고 있는 나에게는 꿈같은 일이었다. 첫째로, 훈련소 때부터 입에 닳도록 말하던 ‘파병 무조건 간다’의 말이 실현된 순간이었고, 둘째로 어떻게든 빨리 전역해야겠다고 생각한 내가 ‘전문하사’라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출동 이외에 장기간 출항이었다. 204일 내내 바다에 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바다에 떠 있는 시간이 굉장히 길었다. 보통 2주 출항에 3일 정박 수준으로 왔다 갔다 했으니. 매번 지겨울 정도로 바다를 봤고, 그 바닷속에서 꿈틀대는 생명들이 나를 반겨줬다. 고래, 돌고래, 거북이 등. 나이도 지긋이 드신 분들조차도 그 모습에 다 아이같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한구석의 순수함이라는 것은 어쩌면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병을 가면서 참 많은 곳을 기항했다. 세이셸, 싱가포르, 아부다비, 두바이, 오만, 지부티, 브루나이, 말레이시아-랑카위 내가 살면서 갈 수 있을까 하는 나라들 또는 들어보지도 못했던 나라들을 가보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넓어졌다. 국제사회 속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이나 해군력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었고, 국위선양뿐만 아니라, 뜻깊은 일을 행하고 있다는 데 있어서 자부심이 들었다. 남들이 흔히 경험하지 못하는 경험을 나의 인생에 써 내려간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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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살부터 25살] - 활동기

12월 5일 23살의 나이로 전역하고 나서는 일주일 뒤 바로 유럽 여행을 떠났다. 시간이 나면 여행을 떠난다는 말은 말도 안 되는 거였고, 갈 수 있을 때 가는 게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39박 40일의 8개국 탐방기가 시작되었다. 영어는 전혀 할 줄 몰랐지만, 진짜 패기 하나만 믿고 여행을 떠났다. 훈련병 시절만 같이 보낸 군대에서 알게 된 동기와 떠난 여행이었다.


유럽 여행은 세상을 보는 시야를 더 넓혀주었다. 파병을 통해서도 느꼈던 부분이었지만 절실하게 느낄 수 있던 부분이 많았다. 왜 영어 공부를 하는 게 좋은지, 왜 세상에 한 번쯤 나와보는 게 좋은지. 그래도 패기 하나로 내가 해보고 싶은 경험을 해볼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유럽 여행이 끝나고 바로 복학했는데, 이때는 내가 무엇을 더 잘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을 많이 고민했다. 전공에 갇히지 않고, 전공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다. 그래서 일부러 단순히 생계 비용을 버는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한 해 동안 공모전을 미친 듯이 했다.


영상도 만들어보고, 기획서도 작성해 보고... 다 처음 하는 일이었지만 처음이었기에 더 겁 없이 도전했다. 파병도 다녀오고, 유럽 여행도 다녀왔는데 무엇을 못 하겠냐는 전역 버프가 있었다.


사실 떨어져도 상관없었다. 2학기 동안에만 10번의 공모전을 나갔는데 7개 정도 수상하고 학점도 최고로 높은 학점을 받는 기염을 토했다. 덕분에 아르바이트 없이도 한 학기를 풍족하게 보내고, 여행도 다녀오는 즐거움도 있었다.


이때 또 욕심이 생겨서 글 이외에 다른 콘텐츠 제작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디자인을 배우기도 했다. 학과에서 유일무이한 3 전공자가 되었다. 국문/철학/디자인까지 듣는 이상한 학생이었다. 기획부터 콘텐츠 제작 및 편집, 디자인 모두 할 수 있으니 조별 과제나 공모전 참여에서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었다.


[25살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 축적과 발산의 반복

이외에 정말 다양한 경험을 했다. 관광객들을 위한 관광 자전거를 이끄는 매니저 역할도 해보고, 청년들의 이야기를 강연으로 만들어주는 단체에서 콘텐츠 기획 및 제작자로 일하고, 인공지능을 쉽게 가르쳐주는 출강 강사가 되기도 하고, 포스코 1% 나눔 재단에서 운영하는 상상 이상 사이언스에 강사가 되기도 하고, 수제 북 바인딩 강사가 되기도 하고. 해본 경험들이 연관성은 전혀 없지만, 그 어떤 경험도 성장에 도움 되지 않았던 적이 없다.


그때의 축적된 경험들이 현재 IT 스타트업에서 일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다. 어휘를 많이 접하고, 문학을 접했던 일들이 서비스 기획단에서 UX write, Copy, 단순 문구 등을 작성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고, 공모전에서 경험했던 문제 정의 능력, 리서치 능력이 지금의 일들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꼭 누군가 정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 후배들에게 늘 말하는 말이지만, 전공이라는 프레임에 갇히지 않는 게 중요하다. 전공을 살리면 좋은 것이고, 전공과 함께해서 시너지를 낼 수 있으면 더 좋다.


앞으로 더 다양한 일들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자신을 잡부라고 정의할 때도 있지만, 잡부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대체 불가능한 인재라고도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스페셜리스트보다, 스페셜 한 제너럴리스트가 되고 싶다. 단단한 경험으로 가득 채워진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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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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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석
이종석

좋은 회고 기록 감사드립니다.^^ 💛

김태완
김태완

항상 답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종석님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