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가 듣는 방식을 보고 확신했다.
· 서울대 근처 지하 원룸에서 한 투자 실사.
2022년 초, 한국을 포함해 많은 곳에서 코로나 거리두기가 한창이던 때였다. 와이프와 나는 이 시기에 연애하는 커플들은 얼마나 힘들까 얘기하곤 했는데, 투자도 거의 비슷했다. 내가 리드하던 딜의 팀들을 직접 만날수가 없었다. 다행히 한 B2B 캘린더 협업툴 팀은 서울대 근처 지하에, 말 그대로 학생 자취방 같은 작업실에서 일하고 있었고, 나는 그곳을 '비밀스럽게' 초대받아 찾아갔더랬다. 그 방문들에서 대표도 나도 이 팀의 문제를 풀고, 결국 이 딜을 성사시키는데 얼마나 진심인지를 느꼈다.
실사 대부분의 대화는 전화나 줌으로 해야 했다. 그래서 4-5개월에 걸쳐 대표와 나는 대화를 자주, 최대한 집중되게 가져갔다(심사역들은 이런식으로 집중적인 심사기간을 소수기업과 진행하는 식이다). 기능을 더 만들어달라는 법인들, 개인사업가들이 팀에 붙기 시작하면, 우리는 우선순위 보드로 돌아가 어떤 리드를 매출이나 파트너십으로 밀고, 어떤 리드를 놓아줄지 실시간 통화했다. 마치 물밀듯 흘러가며 서로에 취하는 연애초기와 같았다.
그 대화가 매번 너무 매끄러웠다. 정신차려보니 나는 B2B 엔터프라이즈 쪽에서 내가 아는 모든걸 이 팀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는데, 이건 대표의 타고난 재능이었다. 엄청나게 잘 듣는 사람이었고, 아마 자기 유저들과도 투자자들과도 나와 얘기하던 방식 그대로 얘기하고, 들었을거다.
투자유치는 덱의 완성도와 너무나 거리가 멀다.
적어도 내가 본 초기 딜 기준으로는 투자자 입장에서 최종적으로 마음이 움직이는 지점은, 대화를 통해 나도 모르게, 내가 나 스스로를 설득했던 몇번의 진-한 대화가 가장 큰 설득 포인트였다.
투자자는 어디서 확신을 얻을까?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1️⃣ 확신은 문서가 아니라, 대화에서 생긴다.
Pioneer Fund 같은 미국 초기 펀드는 때로 1~2번의 미팅으로 투자를 결정한다. 펌의 검토 과정은 단순하다.
A. 창업자가 문제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가?
B. 지금 투자하지 않으면 이 기회를 놓치게 되는가?
C. 우리가 도와줄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는가?
그리고 그 판단은 대화에서 이뤄진다. 심지어 덱 없이 투자하는 경우도 많다.
나는 이중, C가 덱에서 가장 안 보인다고 생각한다. 투자 전 대화가 피칭으로만 채워지면, 투자자는 자기가 도울 자리를 끝까지 못 보고 C를 빈칸으로 둔채 결정하게 된다. 지하 작업실 팀과의 대화에서 내가 아는걸 다 털어놓고 있었던 그 순간이, 돌아보니 투자자와 스타트업 사이의 핏(investor-startup fit)이 좋다는 사인이었다.
근데 이런 대화가 생각보다 드물다. 내가 처한 딜레마이기도 한데, 내가 제아무리 편하게 파운더와 진솔한 얘기를 나누고 싶어도, 대부분의 창업가들은 나보다 우리 회사의 주니어 심사역 또는 인턴과 더 편하게 대화하기 마련이다. 고로 적어도 한국 초기 딜 기준, 시니어 투자자 앞에서 대화가 매끄럽게 흘러가는 경우는 내 경험상 아직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덱만 고치지 말자.
2️⃣ 듣는 방식은, 투자 후 관계의 예고편이다.
투자자는 10-20년을 함께 가야 하는 사이다. 참고로 나는 내가 투자한 딜에서 항상 실무자들과 분기단위로, 때로는 주단위로 직접 대화하고 피벗 전략을 함께 도출했다. 투자 후의 일은 결국 이 대화의 반복이고, 투자 전 몇번의 대화는 그 관계의 첫 샘플인거다.
지하 작업실 팀이 그랬다. 이 팀의 강점은 유저가 뭘 원하는지 안다는 거였는데, 바로 그 강점 때문에 다들 프로덕트에 한마디씩 했고, IT, 헬스케어 등 여러 업계 사람들이 자기 고객이 원하는걸 만들어달라며 협업을 제안해왔다. 나는 이걸 이팀의 강점의 사인으로 봤다(당시엔 우리도 꽤 헷갈렸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같이 일하고 싶게 만드는 팀이라는 뜻이니까.
대표와 나는 한동안 돈을 낼 유저 페르소나 하나를 같이 찾고 있었다. 우리가 붙잡은건 누구의 문제를 풀지보다, 어떤 크고 해볼만한 문제를 풀지였다. 그것만 정해지면 이 팀은 그 문제를 가진 유저에게 어떻게 팔지 알아낼거라고 꽤 확신했다.
몇주 뒤, 팀은 인터뷰 50-100건의 결과를 들고 돌아왔다. 유저들의 문제를 네가지로 정리해서.
A. 연락처를 기기가 아니라 프로젝트 단위로 관리하고 싶다.
B. 흩어진 팀원들의 아웃룩, 구글 캘린더를 한 화면에서 보고 싶다.
C. 그렇다고 보안을 타협할순 없다.
D. 권한에 따라 캘린더를 공유하고 싶다.
2022년 4월의 결론이었고, 2년 뒤 이 네가지는 모두 제품이 되어 있었다. 나에게 다 털어놓게 만들던 그 듣는 방식 그대로, 인터뷰 100건을 듣고 온거다.
투자유치 중이라면, 투자자 말도, 유저 말처럼 들어보자.
시니어 투자자 앞이라 어렵더라도, 투자자가 다 털어놓게 만들자.
투자자의 확신이 덱이 아니라 대화에서 생긴다면, 그 대화를 채우는건 결국 유저 인터뷰에서 들은 말들이다. Founder Sprint에선 그 말들로 가설과 ICP, 미국 진출 방향을 4주 안에 다시 검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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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리콘벨리를 품는 창업가들을 위한 영어 뉴스레터 - https://lnkd.in/gK67Fw_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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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 요청이 늘자 우선순위 보드로 돌아가 어떤 리드를 매출·파트너십으로 이어갈지 함께 판단했다는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투자 대화에서 대표의 ‘듣는 방식’을 본 뒤, 실제로 50~100건 인터뷰를 네 가지 문제로 정리해 온 과정이 그 판단을 뒷받침하네요. 사용자 요청을 그대로 기능 목록에 옮기기보다 문제와 구매 주체를 분리해 기록하는 습관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