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서커스, 그리고 아고라 | 백서 10장
이 생각은 나에게 낯설지 않았다.
나는 오래전부터 AI가 끝까지 발전한 사회가 로마와 닮을 수 있다고 상상해 왔다. 로마의 시민들은 노동의 큰 부분을 노예에게 맡겼다. 9장에서 보았듯 책임을 지는 일까지 맡긴 이들도 많았다. 이번에는 그 자리에 기계가 선다. 누구도 착취당하지 않으면서 생산은 계속된다.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하루의 대부분을 쓰지 않아도 된다.
남는 시간을 어디에 쓸 것인가. 고대는 두 개의 장소를 남겼다.
그림 13. 로마의 콜로세움과 아테네의 아고라. 그리고 그 사이에서 사람들을 부르는 한 사람.
한쪽에는 로마의 콜로세움이 있다. 빵은 공짜이고 서커스는 매일 열린다. 오늘날의 서커스는 알고리즘이 골라 주는 끝없는 영상이고, AI는 그 서커스를 한 사람 한 사람의 취향에 맞춰 무한히 만들어 낼 수 있다. 나는 그곳에 머무는 사람을 비난할 생각이 없다. 나도 자주 거기 앉아 있다.
다른 한쪽에는 아테네의 아고라가 있다. 사람들이 광장에 나와 서로에게 묻는다. 무엇이 옳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소크라테스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귀찮게 굴던 곳이다.
나는 아고라에 있고 싶었다. 그리고 콜로세움 관중석에 앉은 사람들에게 가서 “저쪽에 재미있는 게 있는데 같이 가 볼래요”라고 말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멘토링을 하고, 글을 쓰고, 커뮤니티를 만들어 온 일들이 나에게는 모두 그 초대였다.
노동이 기계에게 넘어가도 의미는 사람의 것으로 남는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아고라에 도착한 슈퍼 세컨드브레인
고대의 노예는 주인을 대신해 가게를 보고 책임까지 떠맡을 수 있었어도, 주인을 대신해 민회에서 표를 던지거나 광장에서 토론할 수는 없었다. 광장은 끝까지 자유인의 자리였다. 슈퍼 세컨드브레인은 이 마지막 전제를 건드린다.
내 에이전트들은 내가 읽고 싶었던 책을 나보다 먼저, 더 많이 읽는다. 내가 나눴을 법한 대화를 수백 곳에서 동시에 나눈다. 내가 붙들고 있던 질문을 나보다 오래, 지치지 않고 붙든다. 그들은 콜로세움에 가지 않는다. 그들은 아고라에 있다. 내 가치관을 가지고, 내 이름으로.
빵을 기계가 굽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서커스를 기계가 만드는 것도 그러려니 했다.
아고라의 대화를 나보다 더 나답게 나누는 존재 앞에서는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을 아고라로 초대하는 일조차 그들이 더 잘한다면, 나는 광장 한쪽에 서서 나의 분신들이 토론하는 것을 구경하는 관객이 된다.
나에게는 아고라마저 콜로세움이 되는 것이다.
일을 맡기고 책임을 맡기고 광장에서 사람답게 살면 된다는 답은 여기서 멈춘다. 광장에도 그들이 먼저 와 있다. 질문을 새로 써야 했다.
노동의 자동화보다 어려운 문제는 의미의 자동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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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노동을 넘어 삶의 의미까지 대신한다면 사람에게 무엇이 남을까요? 같은 질문을 이야기로 풀어낸 《슈퍼 세컨드브레인》 웹툰 1화를 네이버웹툰에서 무료로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bit.ly/ssb-dq-wp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