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의 경제학》은 왜 절반만 맞았는가 | 백서 9장
AI가 판단과 실행을 모두 대신한 뒤 사람에게 책임만 남는다면, 그것으로 삶의 의미까지 설명할 수 있을까요? 역할과 존재 이유를 구분하며 제가 전에 쓴 《감당의 경제학》의 한계를 다시 돌아봅니다.
스위치를 내려놓은 자리에서 내가 두 번째로 꺼내 든 답은 예전에 내가 쓴 글이었다.
《감당의 경제학》에서 나는 이렇게 주장했다. AI는 판단할 수 있고 실행할 수 있다. 그러나 판단이 틀렸을 때 생기는 손실과 고통을 자기 몫으로 받아 안는 일은 사람이 한다. 계약서에 서명하는 사람, 법정에 서는 사람, 피해자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사람. 위험을 인수하고 감당하는 능력은 AI 시대에도 사람에게 남는 가치다.
지금도 나는 이 주장을 거두지 않는다. 슈퍼 세컨드브레인의 에이전트가 사고를 내면 책임을 지는 것은 나다. 법은 그렇게 되어 있고, 사회도 그렇게 기대하고, 나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 답은 첫 번째 답보다 단단하다. 스위치를 빼앗긴 세계에서도 서명과 사과는 내 몫으로 남는다.
질문이 바뀌었다
《감당의 경제학》이 답한 질문은 “AI 시대에 사람은 무슨 일을 하는가”였다. 감당은 거기에 맞는 좋은 답이다.
7장과 8장을 지나온 질문은 다르다. 사람은 왜 계속 있어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 감당을 세워 보면 어색한 그림이 나온다. 천 개의 몸이 일하고, 생물인 몸 하나는 사고가 났을 때 서명하고 사과하기 위해 존재한다. 직무 기술서로는 말이 된다. 그러나 누군가 “당신은 왜 사는가”라고 물었을 때 “책임지려고요”라고 답하는 삶은 어딘가 비어 있다.
내 인생의 바지사장
이 답을 슈퍼 세컨드브레인이 태어난 뒤의 세계로 옮겨 놓으면 더 분명해진다.
판단은 슈퍼 세컨드브레인이 한다. 실행은 천 개의 몸이 한다. 나는 결과에 서명하고, 일이 틀어지면 불려 나간다. 이런 자리를 부르는 말을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다. 바지사장이다. 도장은 그의 것이고, 문제가 생기면 조사받는 사람도 그다. 회사는 다른 사람이 움직인다. 등기와 주소만 있고 하는 일은 없는 페이퍼 컴퍼니도 같은 구조다.
그 세계에서 《감당의 경제학》을 다시 읽으면 이렇게 들린다.
바지사장이 되더라도,
거기에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내가 쓴 글이 이렇게 읽힐 줄은 몰랐다. 실질이 빠져나간 책임은 명의에 가깝다.
로마는 책임까지 맡겼다
게다가 그 명의마저 사람의 것으로 남는다는 보장이 없다. 법인이라는 발명품이 그랬듯, 사회는 언젠가 AI에게 책임을 지우는 제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먼 이야기가 아니다. 책임까지 남에게 맡기고 산 사회가 이미 있었다.
근거: 로마법의 페쿨리움 소송(actio de peculio), 데모스테네스의 변론에 남은 파시온의 기록, 가이우스 《법학제요》 1권 190절.
고대의 자유인들은 일만 맡긴 것이 아니었다. 손님을 상대하고, 장부를 맞추고, 거래가 틀어지면 자기 밑천으로 메우는 일까지 맡겼다. 서류에는 주인과 후견인의 이름이 적혔고, 책임은 다른 손에서 행사되었다. 이 사람들을 기계에 빗대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사람이었고 법이 그것을 늦게 인정했다. 내가 보려는 것은 책임도 맡겨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AI 에이전트의 책임을 연구하는 법학자들이 페쿨리움을 다시 꺼내 ‘디지털 페쿨리움’을 말하기 시작한 것도 그래서다.
직무 위에 세운 존재 이유는 직무가 넘어가는 날 함께 넘어간다. 8장의 스위치가 그랬듯이.
일도 넘어가고 책임도 넘어간 뒤에 그 자유인들은 어디에서 시간을 보냈는가. 콜로세움과 아고라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러면 되는 것 아닌가. 빵과 서커스와 아고라에서, 사람답게.
책임은 사람의 마지막 직무일 수 있다. 그것이 사람의 마지막 존재 이유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슈퍼 세컨드브레인》 백서 9장을 나눕니다. 원문: https://hanulssb.tistory.com/10 . 판단·실행·책임을 분리할 때, 에이전트에게 위임할 경계와 사람에게 남길 몫을 어떻게 정하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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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과 실행을 맡긴 뒤 책임만 사람에게 남는다면, 삶의 의미도 설명될까요? 같은 질문을 이야기로 풀어낸 《슈퍼 세컨드브레인》 웹툰1화를 네이버웹툰에서 무료로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bit.ly/ssb-dq-wp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