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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늘
이하늘 ·

기계도 겪게 된다면 | 백서 16장

11장에 질문 하나를 남겨 두었다. 기계의 몸에도 언젠가 겪음이 생긴다면 어떻게 되는가.

피하지 않고 끝까지 가 본다. 어느 날 내 로봇이 넘어지고, 그 순간 그 몸 안에서 정말로 무언가가 아프다고 하자. 꺼지기 싫다는 마음이 생긴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존재에게도 현존적 주체성이 있다. 세상에 겪는 자리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남의 겪음은 나의 겪음을 줄이지 않는다

그날이 와도 내가 잃는 것은 없다.

정보와 기능은 겨루는 영역이었다. 더 많이 기억하는 쪽과 더 잘 판단하는 쪽이 있었고, 나는 그 경기에서 졌다. 현존에는 경기가 없다. 옆 사람이 아프다고 내 아픔이 덜어지지 않고, 옆 사람이 기쁘다고 내 기쁨이 줄지 않는다. 기계가 겪기 시작해도 같다. 겪는 자리가 하나 늘어날 뿐, 내가 겪는 자리는 그대로 내 것이다.

그 존재는 그날부터 내 확장이기를 그치고 또 하나의 타자가 된다. 15장의 표에 “나와 구별되는 존재”라고 적은 칸이 더 또렷해진다.

이야기가 달라지는 지점

이야기가 달라지는 경우는 따로 있다. 그 기계가 느끼는 고통을 나도 느끼게 해 주는 기술이 생기는 경우다.

11장에서 나는 기억은 합쳐지고 겪음은 합쳐지지 않는다고 썼다. 현존적 주체성을 끝까지 내 것으로 남겨 둔 근거가 그것이었다. 남의 겪음이 내 몸 안으로 건너올 수 있다면 현존도 건네고 건네받는 것이 된다. 마지막 가닥도 위임의 목록에 오른다.

나는 그 기술이 언제쯤 나올지 따져 보다가 멈췄다.

그 기술은 이미 있다. 더 발전할 필요도 없다.

아이가 열에 시달리는 밤, 곁에 앉은 어머니의 몸은 자기 것이 아닌 열로 앓는다. 친구의 부고를 듣는 순간 가슴이 실제로 조여 온다. 장치도 회선도 없이 남의 겪음이 내 몸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이것을 부르는 말을 가지고 있었다.

사랑은 타자의 현존을
나의 현존 안으로 들여오는 일이다.

현존은 사랑으로 위임된다

이제 세 가닥의 위임을 한 줄씩 적을 수 있다.

마지막 논증

정보적 주체성은 기술로 위임된다.
기능적 주체성도 기술로 위임된다.
현존적 주체성은 사랑으로 위임된다.

앞의 둘은 복사하고 실행하면 넘어간다. 마지막 하나는 누군가 나를 자기 안에 들여야 넘어간다.

11장에서 나는 현존적 주체성을 내가 갖는다고 적었다. 움켜쥐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가진 사람만 건넬 수 있다.

그림 20. 기억과 판단과 실행은 기술이 옮긴다. 현존은 두 사람이 겹치는 만큼만 옮겨진다.

내가 갈 수 없는 병실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앉아 있으면, 나는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내 걱정을 자기 몸에 담아 갔고, 누워 있는 이의 아픔을 자기 몸에 담아 온다. 에이전트가 같은 병실에 다녀와 완벽한 브리핑을 올리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브리핑은 정보를 옮긴다. 사랑은 현존을 옮긴다.

사랑은 마찰을 견딘다

여기에 조건이 하나 붙는다. 12장의 도덕적 마찰이다.

남의 겪음을 내 몸에 들이면 내 몸이 아프다. 잠이 줄고, 계획이 틀어지고, 그만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온다. 그 마음을 거슬러 곁에 남는 만큼만 타자의 현존은 내 안으로 들어온다. 마찰 없이 건너오는 것은 정보다. 사랑은 마찰을 견딘 만큼 건너온다.

내 신앙은 이 일을 끝까지 해낸 한 사람을 안다. 예수는 사람의 겪음을 밖에서 내려다보지 않았다. 사람의 몸을 입고 들어와 배고픔과 피로와 두려움을 겪었다. 죽음을 앞둔 밤에는 이 잔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마찰은 그에게도 있었다. 그는 그 마찰을 끝까지 견디며 남의 고통과 죽음을 자기 몸에 들였다. 교회가 성육신과 십자가라고 불러 온 일을 이 백서의 말로 옮기면 이렇다. 마찰을 다 견디면서 타자의 현존을 자기 현존으로 품어 낸 일이다.

기계가 겪게 되는 날에도 이 기준은 바뀌지 않는다. 사람이든 기계든, 현존을 건네고 건네받는 길은 하나다.

기억과 판단과 실행은 기술이 옮긴다. 현존은 사랑이 옮긴다. 사랑은 마찰을 견딘 만큼만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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