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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석
이종석 ·

易地思之

안녕하세요.


화요일 오전 출근길, 카톡 먹통 사태로 인해 주말 동안 잠잠했던 아빠들 단톡방이 활성화됐다. 시작은 스몰토크였다. 평소 같으면 금방 잠잠해졌을 대화가 이날은 좀 달랐다. 열띤 대화가 퇴근 시간까지 이어졌다. 원동력은 부산에서 육아 중인 송이 아빠가 던진 한마디였다.


“어제 경주 노키즈존 카페에 다녀왔습니다. 공간 잠깐 둘러보는 건 괜찮다 그래서 둘러 보고 야외에서 마시고 있는데 다시 종업원이 오더니 NO 키즈존이라고 해서 나왔어요” 그러면서 보내온 한 장의 사진이 아빠들을 분노케 했다. ‘카페 이용객 외 출입불가’라고 적힌 입간판 아래 NO KIDS라는 문구와 아이를 상징하는 픽토그램에 금지표시를 한 그림이 선명하게 보였다. 


“와 저건 좀 심한데요?”

“해외에도 저런 사례가 있나요?"

“노키즈존 특집 한번 갈까요"

“킹키즈존 만듭시다"


다들 쌓여왔던 게 많았던 걸까, 아니면 적나라한 아이 금지 표시에 분노한 걸까?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나도 평소에 수집해오던 노키즈 관련 문구들을 보내며 한마디 거들었다. 


“노키즈 정말 문제죠, 평소에 싫은 게 많은 카페 주인인가 봐요" 


같은 날 오후 네 시, 오랜만에 재개되는 건축답사 프로그램의 예매를 위해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한 사람당 한 장의 티켓만 예약할 수 있는 무료 프로그램인데 두 번의 주말에 평소 눈여겨보던 좋은 공간들이 몰려있어 한두 곳 정도는 아이를 데리고 보러 가도 좋겠다는 계산이었다. 


“내일 두 시 예약인데 여보도 같이 할 수 있으면 좋을 듯! 주말에 이현이랑 가자”

“좋아 좋아. 내일 알람 맞춰놓을게, 아이 동반도 되는 건가?”

“응 예전에 데리고 오는 가족들 봤어, 단독주택이었는데 같이 있는 게 좋아 보이더라”


아내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는 이모티콘과 함께 공지문 하나를 캡쳐해 올렸다. 여전히 조심스러운 코로나 19로 인해 모든 프로그램을 유아 동반 불가능으로 결정했다는 SNS 공지문이었다. 캡쳐된 글을 보자마자 느낀 감정을 만약 카톡에 남겼다면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말도 안 돼 코로나가 잠잠해져서 다시 오픈하는건데 유아만 불가능 이라니! 일부 집은 그럴 수 있어도 전체는 좀 아니지. 실내뿐만 아니라 야외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도 있는데 거긴 밀집도도 낮잖아. 전체를 막는 것도 그런데 코로나와 안전을 이유로 말하니 더 이해가 안 가. 어린이도 마스크 쓸 수 있고 우리 집에서 코로나 제일 빨리 극복한 것도 이현이었다고!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기기 힘든 부모들은 어떡하라고? 그냥 운영진이 원하는건 ㅊㅌ키;ㅓㅁㄷㅏㄴ아ㅜㅐㅈ??’


동시에 깨달았다. 내가 화가 많은 사람이었음을, 그리고 부모가 진상 고객이 되는 건 한순간임을. 불과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송이아빠 사건에 대한 내 메시지는 반쪽짜리 공감이었고, 사진으로 접한 노키즈존은 그저 머리를 잠시 스쳐 간 이미지였다는 것도 뒤늦게 느꼈다. 


현장에서 직접 겪은 아이 출입금지 조치에 비하면 온라인에서 마주한 아이 참여제한 안내가 주는 충격은 작을 수 있다. 하지만 아이를 동반했다는 이유만으로 배제 당하는 경험은 같았고, 이내 ‘열받네’라는 말로는 설명이 안되는(킹받네라는 표현이 적확해 보인다) 억울하고 복잡한 감정이 내 안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규칙이 아닌 차별, 배려가 아닌 배제, 우리나라 아동 인권의 현실, 보호가 아닌 혐오 등등 검색창에 노키즈존을 치면 이미 수많은 언론과 블로그가 논리정연한 문장과 묵직한 단어들로 노키즈존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있다. 문제를 분석하고 논리를 만드는 일이 직업이라 그런지 새로운 근거와 솔루션을 접할 때마다 머리가 개운해지는 느낌도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찝찝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 공지글에 적힌 ‘불가능’이란 말이 박준 시인의 글 제목처럼 죽지 않고 내 머리와 마음속을 떠돌아다녔다. 


노키즈란 단어를 반복적으로 검색하다 보니 이제는 구글이 나에게 알아서 관련 기사를 추천해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중 케어키즈존이 생겨나고 있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아이란 존재를 부정하는 대신, 아이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면 그에 상응하는 만큼 부모에게 배상책임을 묻겠다는 것이었다. 얼핏 취지만 보자면 노키즈에 비해 한 단계 나아진 제도처럼 보였지만 실상을 따져보면 그렇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를 이용하다 보면 어른들도 다양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데 유난히 아이들을 문제를 일으키는 주범으로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론 노키즈존보다 더 합리적으로 포장된 차별처럼 보였다. 


지식만 늘고 생각과 마음은 정리되지 않는 어느 출근길, 라디오에서 익숙한 멜로디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대학생 때 자주 듣던 레드핫칠리페퍼스의 Scar Tissue - 흉터, 또는 상처가 있던 자국이란 제목의 노래였다.


이상했다. 어떤 글을 읽어도 가라앉지 않던 분노의 감정이 노래를 들을수록 차분해졌다. 상처가 아무는 노래를 주제로 선별된 두 세 곡의 노래가 더 흘러나왔을 때도 같은 기분이었던 걸 보면 단지 그 노래를 예전부터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객관적 앎이 위로해 주지 못했던 마음 속 어떤 구석에 대해 음악이 ‘그거 상처 자국이야, 잘못 건드리면 아파‘ 라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다. 


아이를 갖고 난 후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면서 남모를 상처가 많이 생긴 거 같다. 겉으론 깨끗해 보이는 자동차도 자세히 보면 실기스가 많이 나 있듯이, 내 마음도 처음 겪는 육아란 환경에 적응하는 동안 알게 모르게 기스가 나고 어떤 기스는 쌓여서 큰 흉터로 남은 것만 같았다.


가장 많이 쌓인 건 소외감이다. 퇴근 후 자유롭게 여가시간을 보내는 직장동료들을 보며, 주말에 좋은 공간에 다녀오거나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친구들의 인스타 스토리를 보며, 그들이 날 멀리한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따돌림받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실상은 내 욕심이 내 삶을 따라가지 못하는 건데 괜히 아이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연대한 것마냥 생각하고 그로 인해 더 큰 소외감을 스스로 생산하곤 한다. 


이번에 겪은 사건도 같은 문제였다. 아이를 갖기 전엔 아무 문제 없이 참여했던 프로그램으로부터 내가 부모가 되었다는 이유로 더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봤던 것 중에 가장 완곡하고 혐오감 없는 노키즈 표현이었음에도, 그 느낌만큼은 가장 완벽한 소외이자 불의였다. 


한편으론, 그런 경직된 내 마음에 균열을 일으킨 게 설명도 설득도 아닌 위로였던 걸 떠올렸을 때 수년간 풀리지 않고 있는 노키즈존에 대한 사회적 갈등도 차별, 혐오 같은 객관적 정의보다, 당사자들이 겪은 주관적 상처와 불편함에 대한 공감에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노키즈존의 시작이 처음부터 아동 혐오가 아닌 진상 부모로부터 부당한 손해를 입은 점주의 상처와 그로 인한 자구책에서 비롯되었던 걸 보면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옮고 그름이 아니라 따뜻함과 친절함일지도 모른다. 


아이든 어른이든 원한다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고, 원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핑계를 찾는 법이다. 일각에선 노키즈존에 대해 자연스러운 해결책 보다는 법적인 규제를 이야기한다. (나도 한때는 노키즈존이란 귀여운 표현을 못 쓰게 하고 반드시 어린이출입금지라고 적는 규정을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회 전체가 점점 아이를 원하지 않고 아이를 두려워하는 저출산 국가에서 카페 사장님들에게만 호의와 용기를 강요 하는건 모순 아닐까. 노키즈존을 법으로 무조건 금지해도 사람들이 아이와 부모란 존재에 불편함을 계속 느낀다면 가게 주인들은 어떻게든 아이 손님을 받지 않을 구실을 찾을 거다.


노키즈존을 과거 흑인출입금지처럼 현재가 아닌 오래된 역사로 만들려면 궁극적으로 노키즈를 안해도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고 아이들의 권리와 어른들의 의식 수준이 균등하게 높아지는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선(당연한 소리지만) 점주의 보상책임을 완화하는 법과 제도적 정비는 물론 지금보다 훨씬 더 기분 좋은 육아환경과 문화가 조성되어야 한다. 나아가 자연스레 더 많은 사람이 아이를 원하는 시대가 찾아와야 할 것이다. (쓰다 보니 저출산을 해결하는 것보다 모든 부모가 부유해져서 모든 가게가 원하는 핵심 소비층이 되는 게 더 빠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노키즈존을 원하는 점주와 아이를 가진 가족이 서로를 향해 분모를 표현하고 혐오에 기반해 싸움을 하는 사회가 되어선 안 된다. 오은영 선생님이 그러는 것처럼 ‘그럴 수 있다’고, 다만 ‘그게 이런 문제가 있다’고 차분히 얘기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누군가 가진 상처가 아물어야 언젠간 그 사람도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을 테니. 그래야 사회 전체가 상처 없이 육아할 수 있는 환경이 될 테니 말이다. 


끝으로 노키즈존을 운영하고 있는 분들에게도 물어보고 싶다. 흡연도 노 스모커존이 아닌 노 스모킹존이라고 쓴다. 흡연자 자체를 출입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흡연 행위 자체를 막을 뿐이다. 만약 아이들의 말썽이 문제라면 노 키즈가 아니라 노 트러블존이 더 어울리지는 않는지, 요즘 아이들은 영어를 어린이집에서부터 배우는데 후환이 두렵지는 않은지, 만약 그 뜻을 알게 된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 노인들이 말썽이라며 노 시니어존을 만들어도 차별이 아니라 권리라 이야기할 수 있을지 말이다.


그래도 괜찮다면 어쩔 수 없다. 아이에게 선의의 가스라이팅을 하는 수밖에. 노키즈의 키즈가 어린이를 뜻하는 단어가 아닌 또 다른 의미를 가진 단어일 뿐이라고. 노브랜드가 하나의 브랜드인 것처럼 노키즈도 하나의 브랜드 이름일 뿐이라고. 이를테면 노키즈존에는 부모들의 편의를 위해 아이 좌석과 아이 메뉴가 없다는 걸 알려주는 협동조합 같은 곳이니 그 브랜드를 보면 그냥 믿고 거르면 된다고.


출처 : 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Um3xYREsRDmyXsDgiDkYXtmRODC2Sow=


< 생각 정리 >

주변에 생각보다 노키즈존 카페나 그러한 시설들이 많이 보이기는 합니다.


지금은 애들이 다 커서 해당사항이 없지만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저도 여러 번 경험을 하였기에 공감도 가고 불편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저의 생각은 반반이지만 개인주의를 넘어서 이기주의로 가고 있는 세상에 살면서 과연 "易地思之"의 생각과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부모들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부모들이 더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본인들 자식만 중요하고 남의 자식은 중요하지 않다는 부모들도 생각보다 훨씬 많이 존재합니다.


식당이나 카페에 가면 항상 이런 부모들은 존재합니다.


아이들이니까 무조건 용서되고 가능하다는 사고방식은 정말 잘못된 생각이라 생각합니다.


반대로 아이들이 신나게 놀 수 있는 그러한 공간도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아무튼 양쪽 모두의 말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지만 조금 더 타인을 배려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링킹 그룹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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