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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혁
임종혁 ·

핑계 댈 수 없는 시대에 관한 단상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웹 사이트나 모바일 앱을 새로 제작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React Native나 Flutter 같은 크로스플랫폼 프레임워크가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모바일 앱을 만들려면 하이브리드 웹 앱으로 만들지, 아니면 Android와 iOS 중 하나만 네이티브 개발로 출시할지 고민하기도 하고, AWS가 보편적이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베어본으로 서버를 직접 구축하거나 가격을 잘 알아보면서 서버 호스팅 업체를 선정하는 것부터 시작했었습니다. 서버 언어로는 큰 회사가 아닌 한 PHP를 쓸지, 아니면 Python, Ruby 기반의 무언가를 쓸지 고민해야 했는데, 당시에 막 떠오르기 시작한 Node.js라는 모험을 택하는 팀들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죠. 오래된 제품을 유지보수하는 게 아닌 한 새로운 제품을 만들고자 할 때 이에 필요한 기능을 밑바닥부터 구현해서 쓰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오히려 '직접 구현하지 않고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라는 질문을 항상 던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고민의 해결책이 대부분 만들어져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ChatGPT도 이런 시류에 부합하는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목표 달성에 있어서 How를 고민하지 않고도 적당한 결과물을 유례없는 속도와 정말 적은 노력으로 받아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20년 전에 제로보드, 테터툴즈 등을 설치해 쓰던 시절에서 10년 전으로 넘어올 때의 변화보다, 10년 전에서 지금으로의 변화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How에 대한 문제가 해소되니 더 좋은 목표를 찾아내는 일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내가 풀려는 문제가 정말 세상에 의미 있는 문제인지, 이 문제가 지금 타이밍에 풀만한 가치가 있는지, 앞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더라도 내가 그 문제에 도전해야 할 진정한 이유가 있는지 등. 과거와 달리 '방법은 어떻게든 있다'를 전제로 두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Problem과 Solution의 관계에서 Solution 자체에 갇히지 말고 열린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인식이 보편화된 것도 한몫했을테고요.

이것을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핑계 댈 수 없는 시대가 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라는 가능 여부에 대한 얘기보다는 '정말 그 문제를 풀고 싶은 게 맞니?', '그렇게 포기한다면 애초에 애정 없는 목표를 가졌던 것 아니야?' 같은 질문들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모두의 손에 How가 쥐어졌으니, 세상에 더욱 다채로운 Output이 나올 것 같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중요한 질문들까지 함께 보편화되다 보니 How의 양에 비례하여 풍요로운 결과가 사회에 공급되고 있는 게 맞을까 궁금해집니다.

이에 관해서 네이트 실버의 <신호와 소음>에 나온 몇 가지 구절이 떠오릅니다.

인쇄술이 촉발한 정보의 폭발적 증가는 우리에게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준 것으로 판명 났다. 그 이익이 실현되는 데 무려 330년이 걸리고 유럽 전역의 전장에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말이다.

오히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컴퓨터 붐이 경제와 과학의 생산성에서 일시 후퇴를 낳았다. 경제학자들은 이 현상을 ‘생산성 역설productivity paradox’이라 부른다.

빅데이터는 발전을 낳는다. 하지만 여기에는 ‘궁극적으로 볼 때’라는 단서가 붙는다. 발전 시기가 얼마나 앞당겨질지, 그 중간에 퇴보할지 아닌지는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웹이나 앱 제품을 만든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를 설득하는 일을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너무 기술만능주의에 따라서 사고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지금 목격하고 있는 신기술이 요란한 수레나 신기루에 불과한 게 아닌지, '해야 할 것'보다 '하면 좋은 것'에 치중하고 있는 게 아닌지 끊임 없이 고찰하고 주변에 피드백을 요청하는 노력만큼 중요한 게 없어 보입니다.

자신의 신념을 강하게 밀어붙여야만 나아갈 수 있으면서도 언제나 자기 자신이 틀릴 수밖에 없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이상한 길목에 들어선 여러분 모두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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