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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환
연주환 ·

너는 먼 미래의 나이다. feat.허준이 교수님

우연히 인스타그램에서 올해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님의 서울대학교 졸업식 축사를 보게 되었다. 한때 시인을 꿈꿨다던 허준이 교수님의 문장들이 가슴에 와닿아 울렸다. 그래서 필사를 하고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하였다.


1/ 연속되지만 어쩌면 낯선 나


먼 옛날의 나와 지금 여기의 나와 먼 훗날의 나라는 세 명의 완벽히 낯선 사람들을 이런 날들이 엉성하게 이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연속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 연속된 시간들을 모두 기억하지 못한다. 결국 파편화된 기억이 엉성하게 나라는 존재를 이어가고 있다. 그 엉성한 연결 때문에 우리는 먼 옛날의 나와 지금의 나와 먼 훗날의 나라는 세 명이 낯설게 느껴진다. 시간 간극동안 우리는 많은 일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외모도 완전히 다를 것이다. 지금 믿고 있던 것을 믿지 못하게 되거나 세계관이 완전히 변했을 수 있다. 어쩌면 이 세 명의 내가 만나서 대화를 한다면, 타인과 대화를 하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만큼 세월은 길고 다양한 일을 경험하게 되고 그 속에서 변하게 되기 때문이다.



2/ 나에게 모질게 구는 타인도 그저 지쳐버린 한 인간이었음을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명문장이라고 생각했다. 허준이 교수님이 세상과 타인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는 문장이다. 세상의 변덕스러운 우연과 나 자신이 나를 모질게 대할 수 있다. 그리고 타인 또한 나에게 모질게 굴 수 있다. 세상과 인생은 고통으로 가득하니깐. 세상은 원래 모지니깐 그렇다치고, 살다보면 나 자신한테 실망할 수 있으니깐 그렇다 치자. 그러나 타인이 모질게 구는 것은 정말 화가 나고 짜증이 난다. 그런데 지쳐버린 타인이라니.. 결국 타인도 그저 세상의 풍파 속에서 지쳐버린 또 하나의 나였음을 상기시켜준다. 최근 유행했던 영상에서 영화 작가님이 했던 말과 결을 같이 하는거 같다. “그 사람이 정말 미우면, 내 영화 속 캐릭터라고 생각해버려요. 그러면 사랑하게 돼요.”



3/ 나를 지키고 사랑하자.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모질게 구는 타인이 이해가 되니 나도 타인에게 무례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열한 명사들은 나를 사랑하고 지키기 위한 조건들이기도 하다. 나 자신을 무너뜨리려는 달콤함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느끼고 살아간다. 살아있음을 느끼고 엉성하게 이어지는 시간들을 조금이라도 더 채워본다. 그리고 긴 시간의 풍파를 맞으면서 많이 변해있을, 또 과거의 내가 바라고 그려왔던 나와 다를 수도 있는 낯선 나의 모습을 아쉬움 없이 이해해주고 맞이해주자. 낯설고 부족한 나를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럼에도 나이기에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4/ 안쓰럽고 먹먹한 지나간 시간들


오래전의 제가 졸업식에 왔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고민했습니다만 생각을 매듭짓지 못했습니다. 그가 경험하게 될 날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가슴 먹먹하게 부럽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선물할 어떤 축사를 떠올리셨을지 궁금합니다.


지금의 내가 5살의 나를 본다면, 17살의 나를 본다면, 20살의 나를 본다면 어떨까 상상하면 이 문장이 너무나도 이해가 된다. 그가 겪게 될 날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그때만의 아련한 추억들로 가슴 먹먹히 부러워진다. 지금 26살의 나를 바라보는 30살, 40살, 50살, 60살의 나 또한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이라고 확신한다. 분명 우리는(나의 다른 버전들) 앞으로 안쓰러울 정도로 고통을 지날 것이고, 눈물날 정도로 아련한 추억들도 만들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나는 돌아오지 않는 그 순간들을 온전히 느끼며 지나가기 직전까지 붙잡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5/ 너는 먼 미래의 나이다.


타인을 내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먼 미래의 자신으로, 자신을 잠시지만 지금 여기서 온전히 함께하고 있는 타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먼 미래의 나는 낯설고 사실상의 타인이다. 그러나 타인이지만 그 또한 나 자신이기에 사랑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타인 또한 먼 미래의 나를 사랑하듯이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아름다운 논리이다. 너는 먼 미래의 나이고, 나는 먼 미래의 나이다. 그러면 우리 세상은 더 친절하고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축사 필사]

안녕하세요, 07년도 여름에 졸업한 수학자 허준이입니다. 우리가 80년을 건강하게 산다고 생각하면 약 3만일을 사는 셈인데, 우리 직관이 다루기에는 제법 큰 수 입니다. 저는 대략 그 절반을 지나 보냈고, 여러분 대부분은 약 3분의 1을 지나 보냈습니다. 혹시 그중 며칠을 기억하고 있는지 세어본 적 있으신가요? 쉼 없이 들이쉬고 내쉬는 우리가 오랫동안 잡고 있을 날들은 3만의 아주 일부입니다. 먼 옛날의 나와 지금 여기의 나와 먼 훗날의 나라는 세 명의 완벽히 낯선 사람들을 이런 날들이 엉성하게 이어주고 있습니다. 마무리 짓고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 졸업식이 그런 날 중 하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하루를 여러분과 공유할 수 있어서 무척 기쁩니다.


졸업식 축사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요? 십몇 년 후의 내가 되어 자신에게 해줄 축사를 미리 떠올려 보는 것도, 그 사람에게 듣고 싶은 축사를 지금 떠올려 보는 것도 가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당연하게 떠오르는 말은 없습니다. 지난 몇천 일, 혹은 다가올 몇천 일간의 온갖 기대와 실망, 친절과 부조리, 행운과 불행, 그새 무섭도록 반복적인 일상의 세부 사항은 말하기에도, 듣기에도 힘들거니와 격려와 축하라는 본래의 목적에도 어울리지 않을 겁니다. 구체화한 마음은 부적절하거나 초라합니다.


제 대학 생활은 잘 포장해서 이야기해도 길잃음의 연속이었습니다. 똑똑하면서 건강하고 성실하기까지 한 주위 수많은 친구를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은 뭘 하며 살아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잘 쉬고 돌아오라던 어느 은사님의 말씀이, 듬성듬성해진 성적표 위에서 아직도 저를 쳐다보고 있는 듯 합니다. 지금 듣고 계신 분들도 정도의 차이와 방향의 다름이 있을지언정 지난 몇 년간 본질적으로 비슷한 과정을 거쳤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더 큰 도전,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끝은 있지만 잘 보이진 않는 매일의 반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힘들 수도, 생각만큼 힘들 수도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어른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거부하라. 타협하지 말고 자신의 진짜 꿈을 좇아라. 모두 좋은 조언이고 사회의 입장에서는 특히나 유용한 말입니다만, 개인의 입장은 다를 수 있음을 여러분은 이미 고민해봤습니다. 제로섬 상대평가의 몇 가지 퉁명스러운 기준을 따른다면, 일부만이 예외적으로 성공할 것입니다.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줍니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오래전의 제가 졸업식에 왔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고민했습니다만 생각을 매듭짓지 못했습니다. 그가 경험하게 될 날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가슴 먹먹하게 부럽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선물할 어떤 축사를 떠올리셨을지 궁금합니다.


수학은 무모순이 용납하는 어떤 정의도 허락합니다. 수학자들 주요 업무가 그중 무엇을 쓸지 선택하는 것인데,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가능한 여러 가지 약속 중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 구조를 끌어내는지가 그 가치의 잣대가 됩니다. 오늘같이 특별한 날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사람들과 함게하니 들뜬 마음에 모든 시도가 소중해 보입니다. 타인을 내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먼 미래의 자신으로, 자신을 잠시지만 지금 여기서 온전히 함께하고 있는 타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졸업생 여러분, 오래 준비한 완성을 축하하고, 오늘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합니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길 바랍니다. 응원합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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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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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진
윤덕진

좋은 글 감사합니다. 언젠가 봐야지 하고 넣어두었다 보지 못했는데, 디스콰이엇에 전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새로운 출발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한 주를 시작하겠습니다.

심민섭
심민섭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