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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ie

Jamie

컨설턴트에서, 투자자로, 또 세상 밖으로

프로덕트 로그를 작성하는 곳인데, 좋은 팀과 프로덕트를 만들기 전에 내 인생을 먼저 뒤돌아보고 싶어서 써보는 글이다. 좋은 분들께 커피챗을 요청드리기 전에, 자기 소개성으로 쓰는 글이기도 하다.

[학창 시절]

제목은 컨설턴트와 투자자인데,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빼놓지 않을 수는 없다. 나는 서울에서 평범하게 초/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재건축이 한창 진행 중이던 아파트 공사판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참 많은 친구들이 전학을 오고 갔고,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중학교 때 우리 반은 가히 전쟁통이었다. 담임 선생님께서 한 학기에 살이 3kg씩 빠질 정도셨으니..

쉬는 시간에 슬리퍼와 의자들이 날아다니는 싸움통을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았다. 변화가 필요했다. 때마침 자기계발서가 유행했다. 당시 유행했던 공부 9단 오기 10단이란 책을 접했다. 나고 자란 동네를 떠나 민사고를 가기로 결심했다. 한복을 입고 강원도 허허벌판 산중턱 파스퇴르 우유 공장의 뒷편에 자리잡은 학교에서 입학식을 맞이했다.

그러나 처음으로 접한 기숙사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낯선 환경에 이해되지 않는 수업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결국 몸으로 찾아왔다. 1학년 1학기 첫 중간고사 기간 나는 시험을 치르지 못하고 병원을 가야했다. 휴학 처리를 하며 다음 반 년을 집에서 쉴 수 있었다. 고민이 되었다. 다시 1학년부터 시작해서 원래의 학교로 돌아갈지, 아니면 서울에서 새로운 학교에 들어갈지.

중간에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한 학년 밑으로 내려가, 입학식부터 똑같이 다시 치뤘다. 적절할 때에 끊어내는 법을 배우고, 또 동시에 원래 목표했던 것은 포기하지 않는 법을 이 때에 배웠다. 다시 돌아간 학교는 정말 즐거웠다. 감사하게도 부모님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서(?), 하라는 공부는 뒷전이고 고2, 고3 때까지 소소한 학생 창업을 시도했다. 당시에 학생 창업대회가 마구 생기던 시점이었다. 인생의 첫 해외 여행을 창업대회 우승을 통해서 갔다. 자카르타에 가서, 캘리포니아에 가서 (당시에는 그곳이 실리콘밸리인 줄도 몰랐다) 동 나이대 창업가들을 접했다. 우리는 겨우 시제품을 들고 가서 자랑스럽게 부스를 차렸는데, 같은 십대이지만 타국의 창업가들은 당시 내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서 이미 시장에서 매출을 몇 억씩 찍고 있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넓었다. 내 옆에 앉은 친구와 경쟁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학을 가려고 마지막까지 고민을 했다. 그러나 유학은 생각보다 비쌌고, 예상치 못하게 가족에 큰 일이 생겼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것이 하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계획을 세워 나가야 한다. 가장 큰 힘듦은 내가 잘못하고 하지 않은 것에 대한 결과물이 아니라, 나와는 무관하게 발생하는 일들이라는 것을 그 때 배웠다.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나던 시점이었다. 현실은 현실이고, 한국에도 좋은 대학이 많으니, 남기로 했다. 감사하게도, 미스테리하게도, 서울대에 붙었다.

[대학 시절]

법대가 사라진 시절, 내가 입학한 경영대 동기들의 절반은 로스쿨을 희망하고 경영대에 입학한 친구들이었다. 귀가 솔깃했다. 딱히 법학에 관심은 없지만, 학과 수업과 학점에 덩달아 목을 맸다. 대학교 2학년이 끝나던 즈음에, 이대로 학교를 졸업한다면 내가 경영학과에서 배운게 무엇이라고 말하기 힘들 것이란 것을 깨달았다. 무작정 경영대 금융 학회를 들어갔다.

학회의 첫 학기가 끝날 무렵이 되자 다들 인턴을 구하고 있었다. 첫 인턴을 구하기란 생각보다 힘들었다. 뒷골목의 오피스텔에서 면접을 보기라도 하면 다행, 대부분은 이메일을 구구절절 써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불과 몇 년 전인데, 그 때만 하더라도 투자 은행 M&A팀에 여자 정직원은 찾아보기가 너무 힘들어 시장 전체에 있는 여자 분들의 성함을 대학생인 나조차도 다 알고 있을 정도였다. 거기에 경력이나 인맥도 없으니 인턴 구하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운이 좋게 딱 경험 없는 어린 대학생 인턴을 찾는 회사가 있었다. 투자은행에서의 첫 인턴을 시작으로, 사모펀드에서, 컨설팅에서 한 번씩 인턴 생활을 해보고는 프로젝트 단위로 여러 사람과 일해볼 수 있다는 매력에 끌려 컨설팅을 첫 직장으로 선택했다.

[컨설팅 시절]

스물다섯 봄 막 대학교 졸업식을 치루고는 맥킨지 컨설턴트라는 명함을 하나 손에 쥐고 첫 프로젝트에 투입됐다. 첫 주에 3일 간 낑낑대며 나름대로 고민한 내용을 들고 갔는데, 팀장님과 얘기한지 30분 만에 아무 짝에 쓸모 없는 내용임을 깨달았다. 첫 주에 화장실에 가서 몰래 울며 동기에게 전화를 했더니, 그 동기도 울고 있었던 눈물 어린 우리만의 추억도 있다. 역으로 이를 계기로 빠르게 회사 생활에 적응했다. 때때로 컨설팅은 허울 뿐이니 배우는 것이 없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난 다시 돌아가도 첫 직장은 같은 곳을 선택할 것 같다.

다양한 사람과 함께 하는 법을 배웠다. 보험회사의 영업직 사원, 대기업의 상무, 프로젝트 팀의 인턴, 독일 공장의 엔지니어, 회사의 대표.. 그 전까지는 상상하지 못할 범주의 다양한 분들을 만나뵐 수 있었다. 같은 내용을 말할 때도, 내가 누구와 대화를 하고 있고 상대방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따라 이야기의 전달 방식은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누군가는 공감에, 누군가는 똑똑함에, 또 누군가는 숫자에, 어떤 이는 가르침에 매료되고, 반응하고, 움직인다.

내 커리어는 내가 만들어나간다는 것도 체감했다. 맥킨지는 그 어떤 조직보다도 self-motivation이 잘 작동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데, 그 이면에는 열심히 하는 사람은 나이와 경력과 무관하게 원하는 커리어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모두의 암묵적 확신이 있다고 생각한다. 유학에 미련이 남았던 나는, 해외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2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회사 생활을 하면서 절반 가량은 싱가폴, 독일 등 해외에서 근무를 할 수 있었다. 조직에 대한 성과와 나의 interest가 합치되었을 때, 더 이상 워크/라이프의 구분과 둘 간의 밸런스는 그닥 중요한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좋은 리더와 조직 문화란 무엇인지, 나는 어떠한 presence를 갖고 가야 하는 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가능케 해줬다. 식사 자리에서 유일하게 혼이 났던 기억은 막내라고 물을 따랐을 때였다. 회의 자리에서 피드백을 받았을 때는 한 시간 내리 아무 말을 하지 않았을 때였다. 회사 대표님을 붙잡고는 회사에 대한 이런 저런 불만 사항을 털어놓고는 했는데, 그 모든 것이 당연하게 받아졌던 이런 회사를 첫 직장으로 다닐 수 있던 것은 정말인지 내 복이다. 첫 직장은 생각보다 사회 생활에서의 내 자아와 태도를 형성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투자 회사에서]

19년 가을, 나는 독일로 지점을 옮겨 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코로나가 터졌다. 독일어를 하지 못하는 이에게 독일에서의 재택 근무는 우울감을 떠나 생존의 문제로 다가왔다. 20년 5월, 트랜스퍼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한국으로 귀국할 것을 고민했다. 맥킨지 이후에 투자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은 확고했다. 대학 시절부터 이어온 소소한 개인 투자와 사모펀드에서의 인턴십 경험은 내 다음 진로에 대한 확실한 목표를 주었다. 국내에 있는 사모펀드 하우스들의 경우 한 회사 당 인원이 많지 않아, 정기 채용이라는 개념이 없다. 1-2년에 한두 명 씩 채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운이 좋게도 때마침 큰 규모의 글로벌 사모펀드의 투자팀에서 운용역을 뽑고 있었다.

흔히들 컨설턴트 / IB / PE / VC 를 묶어서 유사 직렬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엄연히 그 안에서의 업무와 조직의 특성은 완전히 상이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각 업에서 회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회사"에 대한 견해는, 1) 회사 경영진으로서의 시각, 2) 회사 직원으로서의 시각, 3) 회사의 유저/고객으로서의 시각, 4) 투자자로서의 시각에 따라 모두 다를 수 밖에 없다. 컨설턴트로서 나의 업무는 회사의 경영진과 직원 그리고 고객이 바라보는 시각을 조금씩 들어보고, 경영진의 의사 결정을 도와주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2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투자사에 다녔지만..) 투자를 할 때에는 업 자체의 본질을 파악하고, 경영진/직원/유저 단에서 발생 가능한 변화 및 리스크를 이해하고, 재무제표에 나오는 숫자들이 이면에 내포하는 바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본다. 특히나 자기 자본을 갖고 운용하는 개인 투자자가 아니라 대부분의 VC/PE처럼 투자 받은 운용 자금을 갖고 정해진 기간 내에 투자/회수를 하는 경우에는 리스크와 업사이드에 대한 파악이 더욱이 중요하다. 물론 투자의 단계와 펀드의 성격에 따라, 조 단위의 회사를 일굴 창업자 한 명을 찾기 위해 비전을 가진 스무 개의 회사에 베팅할 지, 리스크를 매니지 할 수 있고 현금 창출력이 훌륭한 꾸준한 2-3x 리턴을 주는 안정적 포트폴리오를 선호할 지 그 방향성은 다르다. 또한 이에 따라 창업자/경영진에 대한 기대 역시 상이하다. 그런 의미에서 경영진 - 투자자가 서로의 방향성을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 또한 한 배를 타는 팀으로서 중요하다.

[다시 세상 밖으로!]

여하튼, 많은 고민 끝에 짧고도 긴 회사 생활을 거쳐 전 회사를 퇴사한지 네 달 정도 되었다. 십 여 년 만에 처음으로 계급장 뗀 인생을 살아보고 있다. 어느 학교의 누구, 어느 직장의 누구가 아닌 그냥 내 이름 석 자로 사는 인생은 조금은 배고파도 자유로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자유는 덜하고 생각 이상으로 처절하다. 시장은 냉정하다. 하다못해 길거리에 나가서 붕어빵을 만들어 백만 원의 매출을 내는 것도, 정말 어렵다는 것을 절절히 느낀 지난 몇 달 간의 시간이었다. 비판하기란 너무 쉽고, 실행은 너무 어렵다는 것을 체감하고는 컨설턴트 시절의 나를 돌이켜보며 반성하기도 한다. 그래도 지난 10년 간 내가 늘 즐겨하던 문제 풀이의 과정을 좀 더 크게, 과감하게 해보는 과정이 큰 의미로 다가온다.

갖고 있던 것들을 놓고 비우는 작업은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보다도 어렵다. 그렇지만 동시에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이 내가 원하는 미래에 있어서 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이를 놓는 것 역시 쉽고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은 남기되 오만은 버리는 것은 끈임 없는 자기 객관화를 요한다. 그 와중에 여전히 나는 불안과 나태를 스스로 달래고 자책하는 과정을 매일 겪는다.

그렇지만 십 수 년 전, 고등학교를 다시 입학 할 때 불안을 감추지 못하던 십 대의 나와는 달리 이제는 처음부터 시작하는 과정과 결정되지 않은 날 것의 시간을 보다 여유롭게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 지난 10년 허투루 살지는 않았나 보다. 늘 그렇듯, 문제는 예상치 못한 데에서 발생하겠지만, 치열하게 고민하고 포기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을 문제는 없다. 다만, 그 과정을 통해 결국 무엇을 원하는 지 스스로 알고 있어야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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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긴 글이지만, 여기까지 읽으시고도 저랑 더 얘기를 나눠보고 싶으시다면, 커피 한 잔 사겠습니다! 편하게 연락 주세요 :) 저와 다른 길을 걸어오신, 타 직군에 계신 분들 (개발자 / 마케팅 등) 더욱 환영입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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