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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yeon Moon
Changyeon Moon ·

이직 5번이 아니라, 전직 5번. 꼬여버린 커리어로도 창업할 수 있을까?


난 사실 웹디자인을 굉장히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퍼블리싱(그 당시에는 코딩이라고 불렀지만)을 좋아했다.

뭔가 레고를 맞추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내가 작고하신 디스트릭트의 최은석님이나 FID의 한명수님, 포스트비주얼의 설은아 대표님 같은 최고의 웹디자이너가 되지 못할 것 역시 알았다.

가끔 내가 만든 사이트가 해외에서 소개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명망있고 권위있는 곳에서 상을 받을 정돈 아니었다.


당시의 디자이너는 지금보다 담당업무 범위가 넓었다.

나만 그랬을 수도 있지만 2000년대 초반의 디자이너라면 포토샵은 당연하고, 일러스트레이션도 어느 정도 쓸 줄 알아야했다. 간단한 편집 디자인이나 명함 정도는 자기가 만들줄 알아야했다. (지금도 명함 주문하는 사이트는 애용중)

플래시는 당연히 다룰 줄 알아야하고, 간단한 플래시용 액션스크립트도 짜진 못해도 수정하는 것 정도는 해야했다. 거기다가 퍼블리싱은 당연히 가능해야했고.

(물론 위지윅 에디터를 쓰는 파와 나 같이 하드 코딩(울트라에디트나 에디트플러스 쓰는)하던 파가 갈리긴 했지만)


퍼블리싱을 좋아하긴 했지만 퍼블리셔로 산다는 건 꿈같은 이야기였다.

지금처럼 세분화되지 않고, 웹디자이너가 퍼블리싱도 하던 시대다보니 전문 퍼블리셔가 된다는 건 꿈도 못 꿀 이야기였다.


웹디자이너로 계속 살 수 있는 것인가 고민하던 그때 친하게 지내던 형님이 창업을 한다며 같이 하자고 했다.

지금은 연이 끊겼지만(그것도 안좋게) 그때 형이 한 말은 아직도 뇌리에 박혀있다.

'내가 봐도 넌 디자이너로 성공못해. 기획자가 되어보는 건 어때?'

좋은 의도로 한 말이었고, 사이가 틀어진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내가 갖고 있는 직업에 대해 남이 그리 평가한 것이 약간은 충격이었던 것 같다.


기획자인줄 알았는데 광고AE가 되었다.

그런데 실제 업무는 광고AE 업무가 더 많았다. 당연히 광고도 처음 해보는 지라 좌충우돌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코바코(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에 전화해서 라디오 광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애는 드물지 않을까? 대행사나 렙사 안끼고 네이버랑 직계약으로 DA도 돌려봤다. (껴야하는지도 몰랐다)

잡지에 광고를 싣는 것도, 신문에 광고를 게재하는 것도 다 알아서 해야했다. (광고 출신이라던 형님은 정작 ATL을 해본 적이 없어서 내가 알아서 다해야했다.)

물론 그 사이에 기업 소셜미디어 운영도 하고, 사이트 기획도 하고, 스토리보드 만들었다. 그래도 몇 년은 버티다가 힘이 들어 퇴사를 하려니, 당시 모(母)회사의 팀장님이 자기 밑에 와서 일해보지 않겠냐고 했다.


그렇게 난 다시 홍보 AE가 되었다.

계열사로의 이동이라 안면을 트고 있던 사람이 많아서 그리 어렵진 않았지만 말할 수 없는 다양한 일들로 흥미진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짧은 근무 후 번아웃이 와 급하게 퇴사를 해버렸다. 파견 근무(그것도 카운터파트로 나 혼자)라는 건 쉽지 않았다.

놀고 있던 나에게 같이 프로젝트를 했던 종합광고대행사 J사에 다니시던 분께서 말했다. 요즘 뜨는 회사가 있고, 거기 대표가 사람을 찾고 있으니 가서 밥이라도 한 번 먹으며 무슨 사업하는지 들어보라고 했다.

별 생각없이 가서 밥을 먹는데 사실은 채용 면접이었다.

그렇게 이력서도 안냈는데 다시 취직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전직을 이렇게 많이 했는데 지금까지 이력서를 내본 적이 거의 없다.

다들 소개로, 추천으로, 운으로 그렇게 회사를 옮겼다.


그렇게 난 디지털마케터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나름 핫하던 분야라 많이 배웠다. 성과도 있었고. 하지만 남의 프로덕트나 제품을 마케팅한다는 걸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물론 연봉도) 마침 같이 일했던 동료가 창업했다며 꼬시길래 다시 스타트업으로 옮겼다


그런데 그 스타트업이 대기업에 인수가 되었다.

그것도 들어간지 6개월만에.

내 평생 대기업에서 일하게 될줄은 몰랐는데...


들어갈 땐 서비스 기획자였는데, 지금은 온갖 기획자다.(난 풀스택 기획자라고 혼자 말하지만)

  • 보험상품 기획도 하고
  • Web/App 서비스 기획도 하고
  • 콘텐츠 기획도 하고
  • 엑셀레레이터 프로그램 운영도 잠깐 했고
  • 필요하면 전략이나 신사업 기획도 한다.

사실 나도 내가 뭘하는건지 잘 모를 때가 많다.


결과론적으로 커리어는 엄청 꼬여버렸다.

대충 말해도 대충 다 알아 듣는데, 전문적인 영역으로 가고 있질 못하다.

퍼포먼스 마케팅을 남들보다 잘 하지도, 광고나 브랜딩을 남들보다 잘하지도, 피그마를 남들보다 잘하지도 못한다. 기획자라면 갖추어야 할 기초 스킬은 다 있는데, 전문적이지 못하다. 마케터로도 마찬가지다. 웹디자인은 말할 것도 없고.(이미 15년 전이다)


요즘 제일 많이 하는 생각은 '주화입마'이다.

맞다. 무협소설에 나오는 그 주화입마이다. 마음에 큰 동요 등으로 인해 몸 안에 도는 기를 통제하지 못하여 내공이 역류하거나 폭주하는 현상.


내가 가진 지식과 아이디어들이 휘몰아쳐서 매일 머리를 꽉 채우고 있는데 기존의 회사의 구조나 방식으론 해결하기 힘든 부분이 너무 많다. 누군가의 문제라서가 아니라 이쪽 도메인이 가진 특성, 어쩔 수 없는 환경 때문인 요인이 더 크고, 외부에서만 문제 해결이 가능한 섹터들이 있다.


금융은 너무 어렵고(토스 등이 많이 해결해주고 있지만), 아직도 고객 친화적이지 않다.

그걸 풀어줄 수 없을까? 그런 고민들을 몇년째 하고 있었다. 고리타분한 금융이라도 재미있는 게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조그맣게 MVP를 만들어 보는 중이다.

내가 세운 가설이 맞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랄까.


늙으면(?) 창업이라고 배 굶어가며 할 순 없다.

사실 하고 싶은 아이템들이 꽤 많았다. 회사에서도 사람들이 아이디어가 많다고 이야기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난 예전부터 창업을 한다면 초기부터 수익이 날 수 있는 BM이 있어야지만 된다고 생각했다.

이 아이템은 그래도 초반부에 조금이나마 매출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해봐야 아는 거지만) 그래서 우선은 이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시작해 보자고 생각했다.


이 모든 걸 혼자서 해보고 있다.

어디까지 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지난 20년간 쌓고 배운 지식들을 총망라해, 내가 할 수 있는 한의 최선을 다 해보는게 먼저일거라 생각했다. 그게 내가 생각한 '주화입마'를 피하는 방법이다.

이제 단축키도 다 잊어버린 포토샵과 피그마로 MVP를 디자인하고, 호스팅을 신청하고, 도메인을 구입하고, SSL을 마련했다.

크몽에서 퍼블리셔를 구하고, 위시캣에서 개발자를 구했다.


7월에 MVP가 나와도 끝이 아니다.

SEO도 해야하고, 검색엔진에 등록도 해야하고, 발품 팔아가며 영업과 고객유치도 해야한다.

조금이나마 광고도 돌리고, 바이럴도 해야한다. 당연히 배너 디자인도 해야하고 소개 콘텐츠도 직접 만들어야한다. 사업계획서도 계속 수정해야하고, 특허나 상표권 출원도 알아봐야한다.


겨우 MVP하나 만드는 것만으로도 결정의 연속이다.

난 이런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는 인간인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인간인가? 가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다. 그간의 내 성향상 괜찮을거라 생각하지만 사람은 직접 해봐야 아는 것들이 너무 많으니까.

내 지론이다. '해봐야 안다'


사람은 아주 작은 사소함으로도 쓰러질 수 있다.

큰병에 걸린 것만큼, 손톱 밑의 가시가 아픈 게 사람이다.

난 그 사소함을 견디고, 큰 어려움도 견딜 수 있는 인간인가.


전직만 5번 한, 내가 할 수 있는가?

일반인 보단 많이 알지만, 전문가보단 덜 아는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고 이 많은 지식들을 잘 융화시킬 수 있는가?

내가 이 모든 것들을 경영자로서 잘 융화시킬 수 있는가. 전략을 세우고 실행할 수 있는가? 자만이 아닐까? 치기는 아닐까? 욕심이 아닐까? 많은 생각이 드는 요즘.


이렇게라도 내가 했던 고민들과 이야기들을 작게나마 남겨보기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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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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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eon Kwon 권도언
Doeon Kwon 권도언

저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해봐야 안다' 실행으로 얻는 것이 단순히 생각만 하는 것 보다 몇 배는 값진 경험과 결과를 주니까요 ㅎㅎ 응원합니다 창연님 :)

Anna Choi
Anna Choi

와, 하신 일들을 쭉 읽어봤는데 꼬여있는 커리어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드는데요? 저마다 개연성이 있는 일들이라 MVP 만드시는데 분명 도움이 되었을 것 같아요. 프로덕트 나오면 공유해주세요 :)

윤종섭
윤종섭

글을 읽으면서 공감을 많이 했습니다. 저도 커리어가 일정하지 않고 현재 작은 창업을 경험하며 위에 언급하신 업무를 하나하나 전부 처음부터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와는 다른 상황이시지만 비슷한 부분도 많아 글을 천천히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글로만 봐도 아이디어가 많으시고 열정이 있으신 것이 느껴지는데요. 지치지 않으시고 새로운 아이템 잘 런칭하시길 응원하겠습니다.🙏

김민지
김민지

너무 공감돼요.. 하나만 쭉 파는 분들은 진짜 대단해보이고, 저는 왜 이렇게 뭐든지 애매하게 다 해봤을까 싶을때가 많거든요 ㅎㅎㅎㅎ

정호건
정호건

ㅎㅎ 저도 따지고 보면 전직 5번은 더 했을꺼 같아요. 창업자의 기질이 충분 하십니다!! 화이팅!!

Harry
Harry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Byunghyun Ko
Byunghyun Ko

많이 공감하고, 반갑습니다. Changyeon님을 응원합니다 !

Doeon Kwon 권도언
Doeon Kwon 권도언

창연님 메이커로그가 Must Reads 208에 선정되었어요! https://stib.ee/Y608

이인철
이인철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라고 동의합니다. 창연님의 글을 보고 응원하겠습니다! MVP가 나오면 디스콰이엇 통해서 소개해주세요!

Kued
Kued

정말 공감이 가네요. 최근 커리어가 꼬이지 않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미리 고민한 부분을 공유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