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가설 세우고 검증하기
평소 서점에 가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모순적이게도 책은 구매하지 않고 빌려 읽는 책을 좋아하지만, 서점이 주는 아늑함 그리고 사람 냄새가 좋기에 주기적으로 서점을 가는 편이다. 그런데, 서점을 갈 때마다 들었던 궁금증이 있다.
"가설; 분야별로 잘 나가가는 표지 색, 폰트가 다를 것이다."
이 궁금증은 잠실 교보문고에 방문하면서 본격적으로 탐구하게 시작했다. 평소 "왜?"라는 질문을 자주 하는 편이라, 서점에서 책 표지를 보며 분야마다 표지의 특색이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어떤 분야는 빨간색, 파란색을 많이 사용하고 어떤 분야는 굵은 폰트를 선호한다. 어떤 분야는 예쁜 일러스트가 책 제목보다 더 눈에 띄기도 한다.
이러한 차이가 우연이 아닌 디자이너의 의도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뒷받침할 근거를 찾기로 했다.
첫 번째로 한 일은 베스트셀러 살펴보기였다.
정치/사회/역사, 인문, 에세이, 경제/경영, 소설 등 다양한 분야의 베스트셀러 표지들이 각각 독특한 느낌을 주는 것을 확인했다.
<표 1. 잠실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분야별 특징>
특히 경제/경영 베스트셀러는 '내 책이 최고지?'라는 느낌의 표지 디자인이 가장 많았으며, 일부는 화려한 표지로 '이 책을 안 사면 너 후회할 걸'이라는 메세지를 전달하는 듯했다.
"여행 책은 왜 표지가 다 사진일까?"
다음으로 <여행 화제의 도서> 코너를 방문했다. 베스트셀러 코너 다음으로 여행 코너를 본 이유는 여행 코너의 방문객이 다른 코너에 비해 다양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행을 싫어하는 일부를 제외하면, 이 코너를 한 번쯤 눈으로 훑고 지나가거나 괜히 한 두 장 넘겨본 사람이 많다. 반면에 과학, 역사, 철학, 마케팅 분야의 경우에는 해당 분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눈으로 흘겨보지도 않고 빠르게 지나치는 사람이 많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여행 책들은 대체로 여행지 사진이나 일러스트로 장식된 표지를 갖고 있었다. 도시, 나라명은 주로 bold 체로 강조했고, 책 제목은 <한눈에 보는 00>처럼 수식어구 + 도시, 나라명의 유형이 많았다. 다음으로 나라별 여행 표지가 어떤 차이점을 가졌는지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일본의 교토나 오사카 같은 도시들은 숲, 나무, 일본 가옥, 벚꽃 사진을 표지로 사용했고, 괌이나 하와이 같은 여름 도시는 야자수, 바다, 푸른 하늘 사진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표 2. 분야별 특징>
<주식 화제의 코너>에서는 두꺼운 폰트와 빨간색, 파란색이 주를 이루는 책 표지들을 많이 보였다. 일부 책은 홀로그램을 사용하거나 배경과 글씨의 대비를 높여 표지의 화려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심리학 전공자로서 항상 지나칠 수 없는 <심리학 코너>에도 가보았다. 심리학 분야의 책은 주로 수식어 및 서술어 형식의 책 제목, 마음을 두드리는 제목이 많았다. 예를 들어, 게으르다는 착각, 사랑의 기술, 나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등이 있다.
그리고 혹시 잠실 교보문고만의 특이점인가 싶어, 광화문 교보문고에도 갔지만 역시 분야별로 책 표지의 강조점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디자인 비전공자의 입장에서 느낀 분야별 책표지 디자인의 차이가 정말 의도된 것인지, 책표지 디자인 관련 논문 3개를 참고하여 "진짜 다른지" 알아볼 차례이다.
"책표지 디자인 개념 살펴보기"
표지 디자인 연구들은 대체로 표지디지인을 레이아웃, 타이포그래피, 색채, 이미지 4개로 세분화했는데 본 글은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낮은 레이아웃을 제외한 3개 요소를 대상으로 살펴보았다.
레이아웃;
타이포그래피, 이미지 등 시각적 요소들을 제한적 공간에서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일
타이포그래피;
명조체(가독성이 높고, 신뢰감을 주는 글자꼴. 신문이나 서적 줄거리용으로 주로 사용)
고딕체(명조보다 대칭적인 글자꼴. 쉽게 눈에 뜨이는 특징이 있어, 주로 신문이나 서적의 제목 표지 사용)
장식체(가독성은 나쁘지만, 조형이나 색채에 의한 풍부한 정보 전달이 가능. 제목으로 주로 사용)
캘리그라피(기존 글꼴이 표현하지 못하는 개성을 표현. 함축적이고 은유적인 표지나 제목에 주로 사용)
이미지;
일러스트레이션(콘셉, 분위기 전달에 매우 유용하여 주제 파악이 어려운 경우에 좋음. 호기심과 시선을 끌기 좋음)
사진(사실성이 강하고, 신뢰감이 높음. 사물의 특징을 밝히거나 글에 대한 믿음을 줌)
컴퓨터그래픽(시각적인 형상을 컴퓨터를 통해 작업. 특수효과 같은 다양한 표현 효과 가능)
색채;
강력한 임팩트를 달성하고, 착시를 만들 수 있음. 글이 지적인 표현을 하고, 색은 감성적 표현을 함.
난색(친근감 있고, 순수하고 여유를 갖게 하고, 부드러운 느낌)
한색(긴장되고, 차갑고 딱딱한 느낌)
"가설 검증; 진짜 분야별로 책표지 디자인이 다를까?"
이영화(2018)가 2017년 교보문고 연간 베스트셀러 20위 책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작가의 창조적 서술이 가득한 소설은 주로 명조체가 많았으며 유연한 에세이나 시의 경우 필기체가 많았다. 이미지의 관점에서 베스트셀러는 대부분 사진보다 일러스트레이션이나 그래픽을 사용했다.
유사하게 남미현과 백진경(2004)은 소설, 에세이, 인문 분야 표지디자인의 시각적 요소를 분석했다. 그에 의하면 작가의 상상력을 풀어내는 소설의 특징은 기계적인 고딕체보다 감성적인 표현이 적합하여 캘리그래피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10권 중 6권). 이미지의 경우에도 독자의 상상력을 높이기 위해 사진보다 컴퓨터 그래픽이나 감성을 더욱 자극하는 일러스트레이션이 사용되었다(=10권 중 일러스트 7권, 그래픽 3권). 색채는 한색보다 편안하고 감성적인 느낌을 주는 내추럴한 색채가 주로 사용되면서, 전체적으로 소설이라는 분야에 맞게 감성적이고 상상력을 증폭시키는 시각적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의 가치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인문 분야의 경우에는 가독성이 높고, 신뢰성을 주는 명조체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10권 중 명조체 8권, 캘리 0권). 또한, 컴퓨터그래픽을 사용하여 인간의 사상 및 문화에 대한 전문성과 시각적 정보전달 수준을 높이고자 했다. 색채의 경우에는 강하고 혁신적인 색상을 통해 개성과 신뢰성을 표현하고자, 원색계열을 많이 사용했다.
이처럼 분야에 따라 책표지 디자인이 다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진짜 의도된 것'임이 밝혀졌다.
추가적으로 흥미로운 점은 남미현, 백진경(2004)의 연구에서 책의 표지디자인만 보고 구매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46.3%(구매 경험이 없는 사람 53.8%)이었고, 특히 여성이 남성에 비해 표지디자인만 보고 책을 구매한 적이 많았다는 부분이었다. 서체의 경우, 20대 집단은 본문용 활자체를 선호했고 다른 연령들은 스타일 서체를 선호했다. 미적 기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성은 스타일 서체를, 기능적인 측면을 중시하는 남성은 본문용 활자체를 선호했다.
따라서 책표지를 디자인할 때는 분야가 가진 특징을 고려하면서 주 독자층의 특징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 표지디자인을 진행할 일이 있어, 이러한 사항을 반영한 디자인을 제작해봤다(with 크몽).
책의 기본 정보를 설명하자면, 이 책은 심리학과 졸업생 7명의 인터뷰를 담은 책이다. 주 독자층은 심리학과에 진학하고 싶은 10대, 심리학과를 전공/복수 전공하는 대학(원)생,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어떤 일을 할지 고민하는 20대였다. 책의 지향점은 정보 전달 형식보다 '사람 사는 이야기'를 전하는 인터뷰이기 때문에 사실성을 강조하는 사진보다 감성을 자극하고 싶었다.
따라서 부드러운, 편안한, 감성적인 느낌을 주는 노란색을 배경으로 두었고, 뉴스레터의 파란색/빨간색 캐릭터를 활용하되 부드러운 느낌을 자아내는 브러시로 제작한 일러스트레이션을 사용했다. 책 제목의 경우에는 1) 오른쪽 하단에 삽입된 뉴스레터의 로고가 고딕체 계열이었고 2) 일러스트가 가진 색 대비가 강한 편(빨간색/파란색)을 고려하여 눈에 쉽게 띄는 고딕체를 사용했다.
과거에는 디자인쪽 전문 지식이 부족하니까 단순히 "예쁘게","잘 어울리게"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디자인도 사람의 마음을 끌기 위해서는 결국 논리가 필요하다.
'디자이너 A님이 알아서 잘 해주세요.'가 그의 능력을 믿는다는 긍정적 의도로 전해질 수도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기획자는 디자인 영역에도 why를 던지고 (근거를 많이 찾고) 고민한 바를 디자이너에게 전달하는 역량도 필요한 것 같다.
(추가. 재미로 보는 온라인 교보문고 종합 연간 베스트셀러 2022년)
한눈에 비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첨부한 온라인 교보문고 자료인데, 이렇게 보니까 더 재밌는 것 같다.
*왼쪽 상단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여행, 기술/컴퓨터, 에세이, 경제/경영의 베스트셀러이다.
[참고 문헌]
남미현, 백진경. (2004). 책표지 디자인에서 시각적 요소가 독자 선호도에 미치는 영향. Archives of Design Research,, 329-338.
송민정, 최은유. (2013). 분야별 책표지디자인의 시각적 요소 분석을 통한 시각적 특징. 한국디자인문화학회지, 19(1), 261-271.
이영화. (2018). 2017년 베스트셀러 표지디자인의 시각적 구성요소에 대한 연구. 한국융합학회논문지, 9(1), 485-492.
감사합니다 교보문고..
격주 금요일, 심리학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뉴스레터입니다 :)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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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글이 되게 구조적이고 깔끔하네요..! 논문을 많이 보셔서 그런가 가설 세우고 표로 정리해서 보여주는게 읽기 편하네요 ㅎㅎ
ㅋㅋㅋㅋ 읽기 편하셨다니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요한님 :)
오 흥미로운 접근이네요!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
작성자만 재밌는 글은 아닐까.. 걱정했는데 재밌게 보셨다니 좋네요! 감사합니다 Vezaki님 ㅎㅎ
하늘님에게 폭로할 가설 검증 결과가 있습니다 CC @이요한
가설도 아니고 결과까지 있다니 도대체 머죠. CC @이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