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과 채움
월요일 11시, 나는 제주도에 있다.
여느 때 같으면 새벽부터 부리나케 사무실로 달려가 지난 주에 못 끝낸 일들을 (일반적으로 항상 쌓여 있다.) 하느라 정신 없을 시간, 지금 나는 제주도에 있다.
2023년 2월의 첫 번째 일요일 저녁, 머리가 너무 복잡하고 마음이 싱숭생숭 했다.
당장 내일이라도 낭떠러지에서 떨어질거 같던, 그토록 불안했던 난, 이 감정과 생각들을 해결하고 싶었다.
사실 난 가족들에게 사업한다고 힘들다 징징거리는 것이 참 싫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지금 이 사업을 하기 위해 가족들의 희생이 필연적이기 때문에, 사업을 하면서 가족들에게 힘들다고 투덜거리는건 나에겐 마치 고3 수험생이 공부 힘들다고 뒷바라지 하는 엄마에게 투덜거리는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냥 내가 누군가에게 징징거리는걸 싫어하기도 하고.
솔직히 내가 그냥 모든 사람들에게 잘나보이고 싶어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기에 그런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날 저녁은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뭔갈 해야만 했었다.
“나 내일 제주도 갈래. 지금 이대로라면 어떻게 될거 같아.”
일요일 밤 11시, 다음 날 아침 9시 비행기 표를 끊었다. 복잡한 생각을 비우러, 새로운 마음을 채우러
그렇게 지금 나는 제주도에 있다.
사실 도착하자마자 뭘 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렌트카 주차장, 차 안에서 한참동안 멍하니 있었다.
급할 것도 없고, 빨리 해야할 것도 없었다. 여긴 제주도니까.
막상 와서 뭔가 하려고 보니, 회사에서 나를 찾는 메세지 몇 개가 왔다.
지난 휴가 때에도 그랬지만 대표는 휴가를 가도 사실 휴가라고 하기엔 참 애매한 구석이 있다.
실질적으로 온전함 쉼이 없는 상태여서 이기도 하지만, 육체는 선베드에 누워 있더라도, 머리 속에서는 사업 구상, 걱정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를 찾는 메세지에 응대하기도 하고, 나조차 예상치 못한 제주행이라 오늘까지 마무리 해야하는 일들이 있기도 했다.
뭔가 변화를 주고 싶었던 나는, 점심 식사를 내가 평상시 시도 안해보던 스타일의 음식인 “피시앤칩스” 를 시도 후 앞으로 나의 스타일대로 음식을 먹겠다고 다시 다짐하고는 오늘 묵을 숙소로 갔다.
숙소 옆 카페에서 내가 매 월 우리 기투자사와 나를 만났던 투자 및 관계자 분들에게 보내는 월간 레터를 작성했다.
매 월 이것을 쓰면서 생각하지만, 시작할 땐 금방이라도 끝날거 같은데, 막상 진짜 끝나는건 5시간 뒤다.
그렇게 월간 레터를 마무리할 때 쯤, 내 정신적 지주인 최경희 이사님에게 전화가 왔다.
이사님은 요즘 복잡해진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기분 좋은 목소리로 칭찬의 한 마디를 하시며 대화를 시작하셨다.
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민을 술술 털어 놓았다.
요즘 내가 어떤 고민을 하는지, 마음엔 어떤 생각들이 드는지, 짧은 순간에 나는 처음으로 내 마음에 있는 짐들을 조금 털어놨다.
그리고 이사님은 내게 “포스트잇 한 장에 고민 하나씩, 몇 개인지 붙여보고 분류해봐. 그리고 이걸 지금 안해도 되는 고민, 오늘부터 할 수 있는 고민, 남에게 맡겨도 되는 고민. 이렇게 분류해보면, 지금 너가 생각하는 것 보다 실제로 너가 해야할 고민은 훨씬 적어질거야.” 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는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사실 아직 아무것도 바뀐게 없었다. 머리 속은 똑같이 복잡하고 어질러진 사춘기 아들의 방처럼 어지러웠고,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그 말대로 하면 이 모든 것들이 사라질거 같았다.
그래서 난 “감사합니다. 이제 저만 잘하면 되겠네요!” 하면서 괜시리 힘내며 말했다.
이사님은 “너만 잘하자고 스스로를 가두지 말고, 너 잘하도록 너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고, 너보다 잃을게 많은 주주들이 있다.” 라며 반장난으로 (반은 진심이셨을거다.) 얘기해주셨다.
그 말을 듣고 정말 마음이 찡해졌다.
그동안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더 잘해야한다는 것이. 그것이 나를 어지럽게 만들었구나.
내가 내려놔야할 것은 욕심이구나 뭐든 하고 싶어하는 그리고 그걸 세상에서 제일 잘하고 싶은 욕심.
그걸 깨닫게 되고 통화를 마치고 나니 한층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늦은 저녁, 옆 건물 펍에서 치킨과 맥주 한 잔 하면서 아까의 말을 곱씹었다.
사실 저 말, 이사님이 나한테 자주 했던 말이다. 서울에선 들리지만 보이지 않았던 말의 의미가 제주에서는 잘 보였다.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고나니 왠지 산책 하고 싶어지는 밤이였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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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권도언 님과 헬스장 가면서 했던 말인데요, 저는 디스콰이엇 팀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제가 사업하면 되게 잘 할 줄 알았어요. 근데 팀에 들어오고 나서 많은 초기 창업자들을 만나면서 이게 정신적으로 정말 챌린징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응원합니다 천명님!! 쉽지 않지만 가치있는 일을 하고 계시니까요!
응원 감사합니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들을 받으며 하다보니 제가 이렇게라도 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해요!
저도 욕심이 정말 많은 편이라 비슷한 고민을 오랫동안 해왔던것 같아요. 새로운 환경에서 마음 많이 비우고 오시기 바랄게요. 응원합니다 :)
욕심쟁이들이 스타트업 쪽에 많이 계신거 같아요 후후..다들 화팅입니다! 감사해요
마음이 싱숭생숭하실때 언제 한번 북클럽 함께 참여하시죠..ㅎㅎ 화이팅입니다!
이번 제주에서 느낀 것이 글을 읽고 쓰는 과정 자체가 비움과 채움이다. 라고 느꼈어요. 사업 시작하고 나서 책 읽기 = 시간나면 하자 라는 생각이였는데, 사업하면서 시간이 난다는건 불가능하고, 시간을 내서 읽어야만 하는 거라고 생각이 들더라구요. 북클럽 고고 하시죠!
마음이 복잡할 때는 제주도에 잠깐 다녀오는게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대표님과 키위스튜디오는 꼭 잘되실거라고 생각합니다. 제주도에서 가치있는 시간이 되실거에요. 화이팅입니다!! 💪
학범님 오랜만이네요! 따듯한 말씀 감사합니다. 학범님과 셀렉트도 화이팅입니다!
포스트잇 이야기를 보니까 생각나는게 있어서 도움이 될까 말씀드려요... 저는 고등학교 때 유난히 걱정이 많은 아이였는데, 12학년 때 대학 원서를 넣어두고 얼마나 많은 걱정을 했는지 정말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을까, 싶은 날들이었어요. 그러던 어느날 제가 살고 있는 곳의 교회로 특강 같은 것을 오셨던 목사님이 제 이야기를 들으시고, '매주 수요일을 [고민의 날]로 정해보는 거 어때?' 라고 제안해주셨고, 매일 고민 거리를 빠짐없이 적은 후에 수요일에 몇 개가 남아있는지 확인한 후에 그 때 남은 고민들만 고민하는 걸로 결정했어요! 그래서 저는 그 이후로 고민이 생기면 매주 수요일을 고민의 날로 정해서 고민을 하고 있는데요, 진짜 놀랍게도 월요일이 되기 전에도 고민이 거의 다 사라져요! ㅋㅋㅋㅋ 그 때 알았어요, 통상 고민의 90% 이상은 그냥 하는 것이라고... 정말 많은 ups and downs가 있겠지만 ups가 있으면 downs도 있고 또 그렇게 롤러코스터를 타고 나면 '와 진짜 쩔었다!'가 롤러코스터니까 너무 많은 고민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기왕 제주도에 가신 만큼 제주도는 엄청 엄청 즐기고 오세요! 응원합니다!
고민의 날 너무 좋은 것 같아요. 고민이 많아지면서 이걸 어떻게 머리속으로 정리할건지..이게 어려웠는데, 이사님도 지우님도 고민을 현실로 가져와서 (포스트잇) 눈으로 보라고 하시는 이유가 있을거 같습니다. 오늘 서울 올라가서 바로 포스트잇 100장 사볼게요. 경험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매주 토요일은 200% Day off를 가지고 있어요. 디스콰이엇이나 다른 일에 관련된 모든 걸 멈춰요. 메일이 오거나 알림이 떠도 절대 열어보지 않아요. 최소한 토요일 만큼은 확실한 디톡스 데이처럼 만들어서, 주중에 쌓인 노이즈/스트레스/고민들을 해소하는 날로 활용해요. 사람마다 방식이 다르겠지만 저는 이렇게 하는게 지난 1년간 큰 도움이 되었어요!
저도 주말에는 최대한 일을 안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근데 알림 오는 것들을 무시하지 못하고 다 열어보는거 같습니다..하하 저도 도언님처럼 Day Off 를... 다만 주중에 못놀아준 아들에게 주말을 할애하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서 Day off 가 되지는 않는...하하 그래도 주말에 행복합니다.